〈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미리보기 #3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의 새 책,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을 미리 보내드리는 네 번째 메일입니다.
지난 두 번의 메일에서 이방인이 누구인지, 그리고 그런 이방인들은 어떤 생리로 살아가는지에 대해 이야기했지요. 오늘은 약간 다른 관점인 '우리가 이방인을 대할 때'에 대해 이야기를 합니다. (스포일러 : 메일 제목에 힌트가 있습니다 😄) 언뜻 어려워 보이지만, 저는 글을 읽으면서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많은 문제들 역시 이 맥락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독자 님도 글을 읽고 어떤 생각이 드신다면, 메일 하단의 피드백 보내기를 통해 이야기를 나누어주셔도 좋습니다.
오늘은 이만 줄이고, 수요일 마지막 레터로 뵙겠습니다. 건강한 월요일 보내세요!
- 담당자 J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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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르면서 같은 자
광인, 혹은 괴물
푸코에 따르면 중세 유럽에서 광인은 짐승과 유아로 취급받았다. 그런데 이방인 또한 광인 혹은 괴물 취급을 받는 게 정석이다. 리처드 커니Richard Kearney 같은 이는 일상인에게 이방인이란 괴물과 신으로 비유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이방인, 신 그리고 괴물Strangers, Gods, and Monsters》). 어쨌든 토박이와 다른 꿈을 꾸는 자, 아니면 한 집단 내에서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자에게 가해지는 배타적이고 모멸적 시선엔 대다수의 사람과 다른 꿈을 꾸는 자를 광인, 혹은 괴물 취급하던 관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한마디로 ‘저 사람은 정신이 이상해’, ‘정신이 나갔어’, ‘짐승이야’ 등의 말을 듣는 것이 바로 이방인이다. 그것은 언어적 낙인이며, 언어적 살인이다. 동시에 그것은 사회적 낙인이며 사회적 살인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할 사실이 있다. 이방인을 광인과 괴물 취급을 하는 사람과 이방인이 완벽히 다른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다. 짐멜이 말하길 완전히 다른 존재는 이방인이 될 수 없다. 다른 것 같지만 같은 것이 반드시 있어야 일상인은 그런 사람을 이방인이라 부른다. 그것이 없다면 이방인이라는 말조차 쓸 수 없다. 그것이 없다면 관심의 범주에서 벗어난다. 따라서 아프리카 가나에서 온 사람은 이방인일 수 있어도 외계인은 이방인이 될 수 없다.
이것을 짐멜은 “친근성과 소원성의 일치the unity of nearness and remoteness”로 표현했다. 이방인은 가깝게 여겨지기도 하고 동시에 멀게도 인식된다. 이방인으로 범주화되는 인물은 “적당히 멀거나 적당히 가까운 것을 완전히 넘어선 존재가 아니어야”만 한다. 그것을 완전히 넘어선 존재는 아예 이방인 취급도, 괴물 취급도, 광인 취급도 받을 수 없다.
데리다도 이와 비슷한 지적을 했다. 그는 “괴물을 애완동물로 즉시 치환하지 않고서 ‘여기에 괴물이 있다’라고 결코 말할 수 없다”라고 말했는데(〈진술들Some Statements and Truisms〉), 그가 지적했다시피 괴물은 결코 그 자체로 괴물로 인식되지도 선언되지도 않는다. 괴물이 괴물로서 인식되기 위해서는 일단 애완동물처럼 최소한의 낯익은 면이 눈에 들어와야만 한다. 그래야 비로소 괴물은 괴물로 불릴 수 있다.
요주의 인물
이처럼 이방인은 완전히 동떨어진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익숙한 것이 발견되어서 오히려 낯선 존재다. 그런 존재는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우리는 서로 다른 것 같으면서 비슷하고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차이를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는 죄다 이방인이다. 다른 것 같으면서도 같다. 다른 지역이나 나라 사람을 만나면 다른 점만 있는 것 같아도 언뜻 동질감을 느끼고 뜻이 통한다는 것을 느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 점에서 의외의 낯섦을 발견한다. 이방인이 바로 그런 존재다. 다름 가운데에도 낯선 비슷함을 발견할 수 있다.
아예 얼토당토않은, 아니면 완전 거리가 있는 말을 하는 사람은 배제나 차별 혹은 핍박 등의 대상으로 자리매김도 못 하거나 관심조차 끌지 못한다. 그들은 특정 집단의 대다수 사람에게 속된 말로 ‘아웃 오브 안중’, 즉 안중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방인이 아니다. 이방인은 ‘아웃 오브 안중’인 듯 보이면서 동시에 오히려 관심의 화살을 집중해서 받고 있는 자다. 요주의 인물로 찍힌 자다. 이방인은 거추장스러운 관심의 화살을 피하고 싶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한번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늪처럼 그는 모든 사람의 관심의 대상이 된다. 물론 부정적인 의미에서다. 이방인은 잘못한 게 없음에도 집중 공격의 대상으로 등극한다. 전혀 바란 적도, 바랄 수도 없는 지위의 획득이다.
조금 과장되지만 데리다의 말은 이방인의 특징을 아주 정확히 묘사해주고 있다. “아무도 자신들이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수학자나 물리학자, 혹은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쓰면서 깐족거리는 사람에게 화를 내게 마련이다”(《논점》). 사실 TV에 나오는 모든 외국인이 우리에게 관심을 받는 게 아니다. 완전히 동떨어졌다고 여겨지는 외국인은 우리에겐 아무런 존재감이 없다. 이방인으로서의 존재감조차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말을 천연덕스럽게 쓰는 외국인을 보면 우리는 그를 존재하는 이방인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이방인의 정체가 어슴푸레 드러난다. 이방인은 가깝고도 먼 타인이다. 이방인은 그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존재다. “가깝게 보이다가도 아주 멀리 있는 사람처럼 보이는 거리감을, 동시에 멀고 먼 사람으로 여겨지던 자가 가까워 보이는 괴이함”을 장착한 타인이 바로 이방인이다. 항상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 그리고 항상 멀리 있는 것도 아닌 그런 아리송해 보이는 묘한 아우라를 가진 자가 이방인이다.
그런데 이런 특징, 즉 가깝게 보이다가도 멀리 보이고 멀리 보이던 자가 가깝게 여겨지는 것이 단지 이방인에게만 해당되는가? 짐멜은 이런 특징이 이방인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도 목도된다고 지적한다. 모든 인간은 이방인처럼 서로가 서로에게 가까웠다가 멀어지고 멀어졌다 가까워지는 그런 존재다. 가장 친밀한 관계도 어느 한순간 갑자기 얼음장처럼 차가운 관계로 돌변할 수 있으며 불구대천의 원수가 하루아침에 동지가 될 수 있는 게 인생사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와 조금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이방인을 혐오스럽게 여긴다. 그것도 모자라 광인으로, 괴물로 여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이방인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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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시대,
정주하는 삶은 없다.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존재로 살아가기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의 이방인을 위한 소고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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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는
3월 초 출간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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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을 재밌게 읽고 계신가요?
다섯 분께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을 보내드리겠습니다 📚
※ 오늘 23시 59분까지 도착하는 메일만 유효합니다.
※ 선정되시는 분의 기대평은 수요일 발송되는 마지막 레터에서 일부 공유될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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