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미리보기 #5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의 새 책,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을 미리 보내드리는 마지막 메일입니다. 지난 영.레터는 어떻게 읽으셨나요? 구독자 님도 떠오르는 경험이 있으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방인은 완전히 동떨어진 낯선 존재가 아니다. 익숙한 것이 발견되어서 오히려 낯선 존재다." 라는 말에서 여러 심상이 떠올라 괜히 속이 복잡해졌습니다. 사회에서 배제되는 여러 소수자 그룹이 떠오르기도 했고, 많은 경우 사회가 그들에게 얼마나 폭력적인지를 떠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방인은 잘못한 게 없음에도 집중 공격의 대상으로 등극한다."
오늘은 마지막 시간으로, 또 다른 주제인 고독과 외로움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흔히 고독과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느낀다고 생각하지만, 잘 떠올려보면 혼자 있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무엇이 우리를 함께 있어도 외롭게 만들까요? 마지막 메일이 그에 대한 답을 드리길 기대합니다.
저는 3월이 끝나기 전, 또 새로운 책과 함께 찾아 뵙겠습니다. 건강하게 새 봄을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 담당자 Jay
(내부 사정으로 인해 약속 드린 '수요일' 보다 하루 늦은 오늘 메일이 발송되었습니다.
기다리셨을 구독자 님께 사과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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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사람
군중 속의 고독
그런데 사람들과 떨어져 혼자 있다 해서 외로운 게 아니고 고독한 게 아니다. 여러 사람과 함께 있는 와중에도 인간은 혼자 있는 것처럼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대학교 1학년 때로 기억한다. 사회학개론 시간에 교재에 실린 사진 한 장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미국의 사회학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과 관련된 내용에 함께 실린 사진이었다. 공항인지 기차역인지 확실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대합실에 운집한 많은 사람을 찍은 사진이었는데 그들의 시선이 모두 한곳으로 모이지 않고 서로 뿔뿔이 흩어져 있었다. 그 사진만큼 군중 속의 고독을 잘 묘사한 것이 있을까? 물론 나중에 읽어본 리스먼의 책은 단순히 그 사진이 표상하던 이미지와 거리가 먼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쨌든 현대사회의 수많은 군중이 서로 타인을 지향해 살고 있다고 리스먼이 말하는 데서 우리는 사진에서 느낀 군중 속의 고독을 끄집어낼 수 있다. 왜냐하면 현대인이 그렇게 타인 지향적other-directed이 될수록 자신의 내면은 더욱더 공허해지고 외로워진다는 것을 리스먼이 말하고 있는 이상 얼추 궤가 맞는 사진이라고 평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간은 공항이나 기차역에 운집해 있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군중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설령 그렇게 큰 대합실이 아니더라도, 호텔방의 투숙객이어도 인간은 외로움과 고독을 느낀다. 광화문에 있는 서울역사박물관에 친구와 간 적이 있다. 1970~1980년대 서울의 강남이 개발되는 시점의 아파트 문화를 보여주는 전시가 나의 주목을 끌었다. 아파트 건물을 칼로 자른 듯 단면을 보여주는 모형 아파트였다. 매 층 똑같은 실내 구조, 같은 위치의 가구, 그리고 사람 모형들. 실제로 그런 곳에 사는 우리 대부분은 얼마나 외로운가, 얼마나 고독한가? 호텔의 각각의 방에 머무는 투숙객은 얼마나 더 외로운가, 얼마나 더 고독한가? 이 외로움과 고독을 관통하는 것은 바로 익명성이다.
그러나 익명성으로 똘똘 뭉친 군중 속에서만 고독을 느끼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름뿐만 아니라 다른 것까지도 서로 꽤 잘 알고 있는 이들과 함께 있을 때도 우리는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기도 한다. 영국의 소설가 파리B. A. Paris가 쓴 소설 《닫힌 문 뒤에Behind Closed Doors》에 이런 구절이 있다.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들 웃고 떠든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생생한 지옥이 되어가고 있는 내 인생을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것은 그곳에 있는 어느 누구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과 함께할 때조차, 그들의 웃음과 수다에서조차 우리는 외로움을 느낀다. 사교 속에 공허함. 나 홀로 남아 있다는 것을 느낄 때가 다반사다. 멀리 갈 필요도 없다. 차 한 잔을 같이 나누기 위해 함께 모인 탁자를 사이에 두고 우리는 타인에게 집중하기보다는 보이지 않고 멀리 있는 타인과의 문자를 주고받는 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그런 타인을 보는 나는 외롭다. 그런 나를 보는 타인도 외롭긴 매한가지일 것이다.
고독을 모르는 인간은
생텍쥐페리Antoine de Saint-Exupéry의 《어린 왕자The Little Prince》에 나오는 대목이다. 사막에 도착한 어린 왕자가 그곳에서 만난 뱀에게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자 거기엔 사람이 없다고 뱀이 답한다. 어린 왕자가 너무 외로울 거 같다고 말하자 뱀이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외롭기는 마찬가지야”라고 말했다. 이처럼 고독은 많은 사람 속에 있거나, 그들로부터 떨어져 나가거나 상관없이 어디에든 있다. 인간은 고독을 선고받았다. 인간만이 고독을 안다. 인간만이 외로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슬픔의 존재다.
이런 천성을 부인하며 외롭지 않다고 생각하고, 나아가 고독 자체를 두려워하고 어떻게든 피하려 하는 자는 우매한 사람이다. 아무리 우산을 써도 물대포처럼 쏟아지는 비를 피할 재간이 없듯, 고독도 마찬가지다. 손으로 하늘을 가린다 해서 하늘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데리다는 “우리에겐 절대적 고독이 주어졌다. 아무도 우리에게 말을 건넬 수 없고, 아무도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그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 우리 자신은 각자 스스로에게 그것을 맡겨야만 한다”라고 토로했다(《죽음의 선물The Gift of Death》).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절대적 고독 속에 처한 운명을 외면하고 시인 릴케가 말한 것처럼 고독하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일상생활을 하는 이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다. 그렇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회 때문이다. 사회 속에, 사람들 속에, 친구들 속에, 가족 속에 있을 때 어지간히 예민하지 않고서는 외로움을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다. 가끔 외로움을 느낄 때가 있지만 그것도 다시 사람과의 관계 속에 묻히면서 ‘그게 뭐가 대수야, 아무 문제 없어. 내 주위엔 사람이 있잖아. 나는 외롭지 않아’로 무한한 긍정의 에너지를 뿜어내며 일상생활을 그대로 유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예민한 감각은 둔감해지고 그와 동시에 외로움과 고독은 종적을 감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많은 사상가는 이런 상태에 영원히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강력한 주의를 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니체는 고독을 모르는 사람은 노예와 같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은 마치 녹음기같이 사회 속에서 다른 사람의 사고와 행동을 그대로 따라 흉내 내는 영혼 없는 기계로밖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확실히 기계가 외로움을 느끼지는 못할 터다.
인간이 영혼이 있는 자율적 존재라면 그는 고독에 정면으로 직면해야 한다. 고독은 사람과 사회로 인해 더럽혀진 인간의 영혼에서 얼룩과 때를 제거한다. 그래서 고독에 직면할 때 비로소 오물이 세탁되는 것이다. 그의 때 묻지 않은 영혼이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그가 고독에 몸을 담그고 몸부림치고 난 이후다. 오스트리아 종교학자인 마르틴 부버Martin Buber가 《나와 당신I and Thou》에서 “고독은 정화의 장소”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후대에 길이 칭송받는 고대의 수도자가 있었다. ‘사막의 성 안토니우스St. Anthony of the desert’다. 그는 무덤에서 15년, 이집트 사막의 버려진 요새에서 20년을 홀로 살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외로움을 고통스럽게 여기지 않았고 홀로 있음을 즐거움과 자신의 타락한 영혼을 위한 회복과 갱생의 기회로 삼았다. 그런 고난의 수행으로 그는 마침내 ‘수도원과 수도승의 아버지’란 칭호를 받게 되었다. 영어로 수도원monastery과 수도승monk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 ‘모노스μόνος, mónos’다. ‘모노스’의 뜻은 ‘홀로, 단독의, 외로운’이다. 외로이 홀로 설 때, 외로이 고독에 직면할 때, 인간은 비로소 정화된다. 그리고 이렇게 정화된 사람, 정화되려 노력하는 사람, 정화되길 학수고대하는 사람이 이방인이다. 그는 사람과 떨어져 거리를 두며 자신 스스로를 처절한 외로움에 그대로 노출시킨다. 그것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천하의 모든 사람이 그를 대적한다 해도 그는 홀로 외로이 그 대적에 당당히 맞선다. 기나긴 유랑으로 이미 피폐해진 영혼, 만신창이가 된 영혼, 집단의 힘이 결국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된 이방인만이 취할 수 있는 용기의 발로다. 그래서 그는 결코 고독을 피하려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까짓 고독쯤이야 이방인에겐 그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그 뒤에 오는 기쁨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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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의 시대,
정주하는 삶은 없다.
우리 모두는 이방인이다.
익숙한 세계에서 낯선 존재로 살아가기 사회학자 김광기 교수의 이방인을 위한 소고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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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영.레터 연재 기념 이벤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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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편이 없는 자, 이방인을 위한 사회학〉 출간 기념 기대평 이벤트가 마무리되었습니다 😁
기대평 중 함께 공유하고 싶은 내용을 전해드립니다.
당첨자 분들께는 오늘 (3월 3일) 중 개별로 회신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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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누구든 이방인일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을 대하든 사랑하려는 마음을 밑바탕에 가지고 살아야 하겠다.
저자의 전개에 아직 희망이 있음을 고대하며 출간을 고대한다."
- hs****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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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결혼을 하고 나서 이방인의 느낌을 많이 가졌습니다.
이방인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메일을 통해 얻었습니다.
완전히 다른 타인, 즉 외계인은 이방인으로 느끼지 않군요.
오히려 나랑 비슷하면서 다른 타인! 한국어를 쓰는 외국인!
그러고 보니 맞는 것 같습니다.
관심을 안주면 좋겠는데 왜 그렇게 예의주시하면서 관심을 가지는지.......
이방인이라는 시선으로 보기 때문이군요.
제가 보기엔 그들이 이방인인데 말입니다."
- co****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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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의에 의한 '이방인'이 아닌, 자의에 의한 '이방인'이 되고 싶은 저의 이 욕망과 욕구는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 고민이 많은 요즈음,
오늘의 글을 보며 또 생각에 잠기게 됩니다.
어디에도 속할 수 없는 '투명 인간'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인데,
언제든 떠날 준비를 하며 마음 조리며 살 수도 있는데- 라는 걱정들과 말이죠.
그래서 그 이후의 글들, 또 이 책이 담고있는 내용이 궁금하여 이리 후기를 남깁니다."
- mi****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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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아닌 '나'를 기준으로 하는 책이라 색다를 것 같다는 느낌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나라에 와서 자리 잡은 외국인들이나 외국인 노동자들, 그들도 이방인일텐데.
그 마음을 간접경험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 (저는 외국 체류 경험이 전혀 없답니다.)"
- ma****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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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리학을 전공하고 수학 언어에 익숙하다는 것이
나도 모를 사회적 안정망에 속하게 해주었다는 것도
처음 배웁니다. 운이 좋았네요. 오래 알던 사람이 낯설고,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을 실제로 모르고 있었고,
상대에 따라 전혀 다른 방식들로 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한,
그래서 우리 모두의 모든 인간관계에서 목도될 수 있는
누구나 누구에게 이방인인 묘한 관계성...
그러니 더욱더 포괄적 차별금지법은 필요하다고 믿습니다.
익숙했다 한순간 낯설어지는 사회와 관계,
어쩌면 스스로가 스스로에게 그런 존재인 우리 모두의 최소한의 안전망으로 말입니다."
- ki**** 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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