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연된 실감
대부분의 사람은 수많은 타인과의 만남 속에서 그리고 그것과 함께하는 새로운 상황 속에서 이방인으로 그곳에 참여한다. 그리고 그 첫 만남에서 그들의 의식은 현실감각을 상실하게 된다. ‘실감의 실종’은 이방인이 겪는 독특한 경험이다.
슈츠가 제시하는 이방인의 예—폐쇄적인 사교클럽의 막 들어온 신입회원, 신부 가족을 처음 만난 예비 사위, 대학에 들어간 농부의 아들 등—에서 여지없이 관찰되는 것은 그들이 새로운 집단으로 진입하고자 만남을 시도했을 때 그리고 그런 상황에 접했을 때 현실감각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슈츠의 말대로 이방인은 이제 밖에서 관찰했던, 어렴풋이 그려보았던 세상이 아닌 “생생하고”, “최고의paramount” 실재 속에 진입하게 되었다. 아이러니는 완전히 압도당한 현실에서 이방인은 정신줄을 놓고 만다. 그러면 현실감은 그 순간 발동하지 못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고개를 들게 된다.
이러한 일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말해, 이방인들에게 보이는 지연된 실감(혹은 현실감각의 일시적 부재)은 무엇에서 연유한 것일까? 슈츠가 이것에 대한 근본적인 답을 직접적으로 제시한 적은 없다. 그러나 슈츠는 이방인을 “무대 객석에서 무대 위로 뛰어올라 간 관객”에 비유한 적이 있다. 우리는 여기서 힌트를 충분히 얻을 수 있다.
연극을 보러온 관객은 무대 위에서 공연되고 있는 드라마에서 단순한 방관자이자 구경꾼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가 공연이 진행 중일 때 갑자기 무대 위로 불려 올라와서 그 드라마를 이뤄나가는 인물이 되었다고 치자. 객석에 있을 때와 막상 무대에 올랐을 때의 상황은 확실히 다를 것이다. 그가 무대 위에 올랐다는 것은 생생한 현실이다. 그러나 그가 정작 그것을 실감하려면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지연이다. 객석에 있을 때와 무대 위에 올라왔을 때가 너무나 달라서다.
그 경우 처음엔 누구나 어리바리할 것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다. 일상의 모든 것이 다 그러하다. 그렇게 흘러간다. 처음 접하는 것, 처음 만나는 것과의 조우는 대개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만 그 당시에는 실감의 부재가 치고 들어온다. 그것을 실감하는 것은 훨씬 나중이다. 어느 정도 익숙해진 다음에야 현실감각은 충만해진다. 몸에 밸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다. 실감은 새로운 타인과의 만남, 새로운 환경과의 만남이 자연스럽게 여겨질 때까지, 즉 앞에서 봤었던 자연적 태도가 몸에 밸 때나 비로소 그 나래를 펼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지연된 실감이 지배하며, 그러는 동안 이것을 경험하는 이들은 확실한 이방인으로 남을 것이다.
인생은 영화가 시작된 후 늦게 들어간 영화관
누구나 한 번쯤은 영화관에 제시간에 도착 못 해서 영화를 처음부터 보지 못하고, 몇 분 정도 늦게 들어가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얼마나 갑갑한가? 그 앞 내용이 얼마나 궁금한가? 그러나 알아낼 도리가 없다. 영화를 보는 동안 친절히 알려줄 이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앞의 흐름을 추정하며 영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럴수록 앞의 이야기가 더욱더 궁금해진다. 어쩌면 영화를 다 보고 나서도 결말이 왜 그렇게 났는지 시원한 해답을 못 얻을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이야기의 끝은 처음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처음을 못 봤으니 결말도 이해하기 어려울 수가 있다.
미국의 비교신화학자 캠벨Joseph Campbell은 인생 자체를 이렇게 영화관에 늦게 도착해 자리에 앉아 도대체 앞부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감을 못 잡고 허둥대는 관객에 비유했다. “인생은 늦게 도착한 영화관 같은 것이다. 도대체 앞부분에 무슨 이야기가 펼쳐졌는지 주위 사람에게 실례가 될까 봐 물어볼 수도 없는, 영화의 결말을 보지도 못하고 그전에 예기치 않게 밖으로 불려 나와야 하는 영화관 같은 것이다.” 절묘한 관찰이다.
황당하기 이를 데 없고, 허무하기 이를 데 없는 인생, 그것이 바로 삶이며, 그것이 또한 이방인의 삶인 것이다. 처음도 끝도 알 수 없는, 그렇다고 물어볼 곳조차 없는 애처로운 처지의 인간 그리고 이방인. 그들에게 있는 것이라곤 정답지 없는 의문투성이, 언제 끝날지 모를 불안한 삶의 연속과 지연된 현실감각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인생은 흘러가고 그렇게 이방인의 삶도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