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 완전한 타인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이방인을 경계하라?
낯선 이를 피하라! 이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켜야 하는 일종의 경구가 되어버렸다. 특히나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는 자녀에게 낯선 이가 접근해오면 반드시 피하라고 가르친다. 어른이 되어서도 어릴 때 교육받은 대로 낯선 이, 즉 이방인은 무턱대고 의심부터 해야 하는 요주의 인물로,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이방인은 친구가 될 수 없는 존재로 구별하며 어쩌다 그들과 섞여 있더라도 물과 기름처럼 융화될 수 없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한마디로 말해서, 이방인은 멀고 먼 존재다. 이와는 반대로 가족과 친구를 비롯해서 친한 사람은 매우 가까운 존재다. 가까운 이들과는 비교적 허물없이 지내며 흉금을 털어놓고 우의와 사랑을 다진다고 믿고 있다. 이에 비해 이방인은 그럴 수 있는 존재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 흔한 통념 중 하나다. 과연 그것은 맞는 것일까? 섣부른 판단은 금물. 다음의 경험담을 보고 판단해도 늦지 않다.
우기 아니랄까 봐 어김없이 지긋지긋한 비가 내리는 우중충한 날이었다. 오리건주를 방문했다가 워싱턴주 시애틀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어느새 밤이 깊어지고 울창한 침엽수림 까지 더해져 온 세상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뒤덮였다. 해안가에서 내륙으로 향하는 비 내리는 지방도로는 말 그대로 구불구불, 위험천만이었다. 가뜩이나 밤눈이 어두운 나에게 그 길은 지옥의 심연, 타르타로스Tartaros와 다름없었다.
그때 저 멀리 앞에 간간이 브레이크를 밟는 차량이 어렴풋이 보였다. 시야 확보가 어려운 밤에는 일정 간격을 두고 앞차를 따라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길의 모양새가 대강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 차 덕분에 나는 안도감과 여유를 갖고 지방도로를 벗어나 고속도로로 진입해 시애틀로 향할 수 있었다.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었다.
그런데 고속도로로 갈아타는 분기점에서부터 앞차가 버벅거리기 시작했다. 고속도로에 차량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나는 수많은 차량의 미등과 헤드라이트가 시야를 밝혀주었기에 그 차를 추월해 내 차를 쌩쌩 몰았다. 그러길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뒤로 차량 한 대가 따라붙은 것을 알았다. 잠시 경찰차로 오인했지만 다행히도 지방도로에서 나를 인도해주던 바로 그 차였다.
놀랍게도 그 차는 계속 나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뒤꽁무니에서 떨어지는 법이 없었다. 그렇게 지방도로에서는 내가 그 차를, 고속도로에서는 그 차가 나를 인도자로 삼아, 두 대가 꼭 한 대인 양 한밤중 미국 북서부의 빗길 도로를 달렸던 것이다.
더욱 흥미로운 일은 그다음에 벌어졌다. 내가 추월하려고 차선을 변경하려 할 때, 해당 차선의 다른 차량이 속력을 높여 내 진입을 방해하려 들었다. 그럴 때면 내 뒤를 바짝 따르던 차가 내 추월 시도를 좌초시키려 드는 해당 차량의 전면에 재빨리 파고들어 내가 진입할 수 있게 앞 공간을 터주거나, 자신이 파고든 김에 아예 앞으로 치고 나가 내가 차선을 변경할 수 있게 뒤 공간을 내주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나와 그 차는 짝을 이루어 달렸다.
시애틀에 진입하기 전에 고속도로가 두 갈래로 나뉘었다. 나는 왼쪽 도로를 타야 했다. 분기를 알리는 표지판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나는 1차선으로 일찌감치 갈아탔다. 뒤따르는 차에 왼쪽 길을 탈 것이라는 암시를 주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뒤차는 오른쪽 차선으로 이동해 나를 추월한 후 왼쪽 깜빡이를 켜고 내 앞으로 진입했다. 그러곤 비상등을 잠시 켰다가 끄고서는, 이내 바로 오른쪽 깜빡이를 켜고 맨 오른쪽 차선으로 빠지더니 오른쪽 고속도로로 향했다. 나는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 차의 일련의 행위가 나에게 하는 작별 인사였다는 것을. 아울러 지방도로에서 안내자가 되어준 그 차에 내가 고마워했듯이, 고속도로에서 안내자가 되어준 내게 그 차가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라는 사실을. ‘재미있는 시간이었어. 친구, 고마워. 잘 가’ 하는 인사였다는 것을! 그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가슴에서 무언가가 올라오는 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그날 일각이 여삼추라 한시라도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기를 바란 내 마음을 알아주었던 사람은 차에 함께 타고 있던 내 아내도, 자식들도 아니었다. 가족들은 나를 믿고 곤히 잠이 들어 있었다. 그들은 나의 곤경과 애로를 전혀 몰랐다. 나의 가족은 그날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도통 모른다.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당시 운행의 어려움을 유일하게 알아주고 보듬어준 사람은, 그날 그 차에 있던 타인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나에게 완전히 이방인이었고, 그의 입장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누가 오래된 친구만이 진정한 친구라고 감히 말하는가? 서로 낯선 타인이었음에도 그와 나 사이에는 확실한 교감과 상호 이해가 분명히 존재했다.
가깝고도 먼 존재 이방인
멀리 있는 자가 가깝게 느껴지고 가깝던 자가 멀리 느껴지는 게 이방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 아닌 자가 누구인가?
아니, 원래부터 이방인이 아닌 자 누구인가? 우리는 모두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청맹과니 이방인이다. 만남으로 이루어진 관계와 사회는 이방인의 것, 이방인의 세계다. 우리 세계는 순전히 이방인투성이다. 오랜 친분으로 특징되는 친구, 친지, 가족 등의 관계는 이와 무관하다 여기는 것은 모두 허상이요, 착각이다. 그 관계 속에서도 우리는 그들을 이방인으로서 경험할 때가 분명히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무엇보다 이 세계에 우리는 모두 이방인으로 침입해 들어왔고, 언젠가 홀로 이 세계를 빠져나갈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관계 맺는 시간의 길고 짧음으로만 이방인과 이방인 아닌 자를 나누는 버릇이 있다. 짧으면 이방인, 길면 이방인이 아닌 자라는 식이다. 이 얼마나 우매한 일인가. 이방인은 결코 믿을 만한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런데 보라. 나는 고속도로에서 만난 이방인을 친구라고 느꼈다. 아니, 친구에게 느끼는 것 이상으로 강렬한 감정까지 느꼈다. 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그래서 그 이상한 감정 때문에 그는 나에게 이방인이다. 멀지만 가까이 있는, 그러나 다시 사라져 멀어진 이방인. 10여 년이 지난 뒤에도 여전히 내 뇌리 속에 남아 있는 이방인. 그러니 이방인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친구는 이방인일 리 없다고 속단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완전히 낯선 타인, 즉 이방인이라고 해도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애초에 처음부터 친구는 없었을 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