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균적인 보통의 몸과 마음을 뜻하는 정상성normalcy 개념은 너무 흔하고 일상적이어서 집단 문화의 상상 속에 고이 잠들어 있다. 그러나 삶의 이상적 기준이 된 정상성의 역사는 독자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짧다. 이를테면 우리가 정상적인 발달 곡선(소아과 정기 검진에서 내 아이의 신체 치수가 그 정상 범위에 들기를 바라는 곡선)의 ‘궤도상’에 있는지를 따지게 된 것은 200년도 채 되지 않는 현대 특유의 현상이다. 사회과학자들은 19세기 초부터 인구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고 연구하기 시작했는데, 이런 측정값이 특히 의학에 유용할 거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흔하면 ‘정상’이고 드물면 이상치가 되는 통계의 ‘종형 곡선’(정규분포 곡선)이 도대체 어떤 면에서 의사에게 인간과 인간의 질병에 관한 통찰과 이해를 줄 수 있을까?
장애학자 레너드 데이비스Lennard Davis는 “19세기 이전에는 서구 문화에서 ‘이상理想’의 개념이 신체를 지배하는 주요 패러다임이었다”라고 썼다. “따라서 당시에는 모든 인간의 몸이 이상적이지 못했다.” 표준이 규정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어느 인간의 몸이든 초인적 존재, 즉 신과 영웅들이 가진 완벽한 몸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현대 통계학의 등장으로 비교의 대상이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고귀하고 추상적인 존재에서 주변 사람으로 바뀌었고, 다른 사람을 상대적으로 관찰함으로써 ‘정상성’을 판단하는 비교 분석이 시작되었다.
지금이야 정상성을 결정하는 이 친숙한 비교가 너무 흔해서 시대를 초월한 보편적인 개념으로 느껴지지만, 유럽에서 정상이란 단어는 1840년 이후에야 인간의 특성을 기술하는 데 사용되었다. (그 전에 ‘정상normal’이란 예컨대 목수가 수직이나 직각을 나타낼 때 쓰는 기술 용어였다.) 당시에는 프랑스 영토였던 헨트 출신의 벨기에 통계학자 아돌프 케틀레Adolphe Quetelet는 과학에서 평균을 계산하는 과정, 예를 들면 천문학자가 측정의 오류를 최소화하기 위해 사용한 방식을 수정해 인간 형질의 과학을 통계학으로 개조해버렸다. 케틀레는 자신이 주창한 ‘평균인l’homme moyen’ 개념은 측정 가능하며, 따라서 신체적, 도덕적 자질 면에서 사람의 등급을 매길 수 있다고 주장했다. 역사학자 피터 크라일Peter Cryle과 엘리자베스 스티븐스Elizabeth Stephens는 19세기를 거치면서 인간 연구의 초점이 이 평균적 인간에 맞춰졌고, “이 정상형을 인구 전체의 참고 기준으로 삼으면서 연구 대상의 폭이 좁아졌다”라고 말한다. 이들에 따르면, 이런 축소의 파급효과는 큰 결과를 불러왔다. “정상성 규칙이 적용되면, 단순한 산술평균 이상의 ‘자연스러운’ 평균을 보여주는 규칙적인 분포가 나타날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인간 집단에서 일반화된 특성을 파악하는 것은 사회과학의 예측력에 유용하며, 그 일반성generality이 ‘정상’ 또는 ‘보통’의 유산이 되었다. 통계는 독감의 계절적 조류를 이해하거나 교통량 패턴의 최적화된 관리를 결정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통계적 사고 습관이 광범위하게 적용되면 중요하기로는 마찬가지인 개별성이 가려지는 소외효과를 낳는다. 사회과학자들은 이것을 “집계화의 오류aggregative fallacy”라고 부른다. 집계화의 오류란 한 집단의 특징은 필연적으로 그 집단에 속한 개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잘못된 가정이다. 집단을 나타내는 특성에도 가치는 있지만, 통계는 개인의 삶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한다. 우리는 매일 이러한 긴장 속에서 살며 논쟁하고 있다. 자신을 볼 때, 자신만의 특이성이나 유일성을 강조하는 게 중요할까? 아니면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서 인식하는 게 중요할까? 개별성과 집단성, 하나와 다수, 두 개념 모두 사적인 인간으로, 또 시민으로 살아가는 삶에 의미를 부여한다.
19세기를 거치며 정상성은 ‘광범위하고 포괄적인 권한’이라는 유해한 힘을 뒷받침하게 되었고 결국 그 유산이 현대에까지 전해졌다. 평균적인 것은 곧 바람직한 것이 되었고 신장, 체중, 그 밖의 신체적 특징이 다수의 범위에 포함되는 것은 바람직함을 넘어서 의무로까지 여겨졌다.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은 곧 자연이 내린 유전적 명령이라는 (잘못된) 해석이 문화에 만연해졌다. 정상성은 식별될 수 있고 따라서 명백히 강화되고 격려될 수 있으며, 그렇게 평균은 더 좋고 가장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영향력을 지니게 되었다. 케틀레의 유산은 정의로만 따지면 눈에 띄지 않아야 할 평균의 개념을 모순적 이상형으로 만들었다. 평균에 문화적 가치가 생기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 공통적인 것이 ‘자연적인’ 것으로, ‘자연적인’ 것이 옳은 것으로 보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20세기 초 우생학 운동을 통해 정상성의 공격적 추구가 장애인을 향한 폭력으로 이어지면서 정상성 숭배는 가장 추악한 모습을 드러냈다. ‘바람직한’ 개인과 가족의 유전자만 육성해 국가의 번영을 이룩하려는 의도에서 강제로 시행된 대규모 불임수술과 안락사. 이런 끔찍한 발상은 소수의 비주류 사상가가 퍼트린 사악한 생각이 아니었다. 우생학적 사고는 미국 중서부 지방에서 열린 주州 박람회의 유전자 ‘대회’처럼 악의 없는 형태로 1920년대 미국에서 퍼져나갔다. 이런 대회에서는 상대적인 유전 형질로 “더 나은 아기” 그리고 “더 적합한 가족”을 평가했는데, 이는 그 옆에서 열린 가축 품평회나 원예 대회와 다를 바가 없었다. 이런 대회를 알리는 선전 문구는 다수의 최적화된 인구집단에 닥칠 위험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어떤 이들은 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짐이 된다.” ‘우리’의 전반적인 건강과 번영을 추구하는 데 열심인 나라에서 우생학적 사고는 정상성의 개념 위에 올바름과 기꺼이 받아들임, 심지어 시민이 지녀야 할 책무의 가치를 덧씌웠다.
이제 역사의 가장 어두운 장은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류의 진보와 완벽성을 갖춘 정상성이라는 무언의 방정식은 어느덧 일상의 화법과 습관적인 결정에 꽤나 편안하게 자리잡고 있다. 집계화의 오류는 우리가 다른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이 ‘기대에 충족하는지’, ‘앞서 나가는 데’ 필요한 것들을 갖추고 있는지, 그래프상에 있는지 그래프에서 벗어나는지를 평가할 때마다 등장한다. 데이비스가 그 영향력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정상성 개념이 도입되면서 (…) 종형 곡선(정규 곡선)을 마치 모든 것이 그 피크 아래에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기준인 양 신봉한 우생학 운동이 보여주었던 평범의 의무가 창조되었다. 종형 곡선의 도입으로 ‘비정상적인’ 신체라는 개념이 생겼다. 그 이후는 모두가 아는 바대로다.”
2011년 세계보건기구(WHO)의 종합 보고서에 따르면 오늘날 전 세계 인구의 15퍼센트에 해당하는 10억 명이 장애를 갖고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많은 이들의 몸과 마음이 모두 정상성의 지붕에서 벗어난다는 계산은 너무도 이상하지 않은가. 표준화의 규칙에 따라 설계된 세상에서 거부되는 몸을 지닌 어맨다 같은 이가 결코 소수라고 할 수 없는 10억 명이나 되는데 말이다. 이 보고서에서 말하는 장애에는 운동장애, 감각장애, 정신질환, 인지 및 발달장애, 일반적인 노화가 포함된다. 이런 상태는 선천적일 수도 후천적일 수도 있고, 빈곤의 결과일 수도 우연한 결과일 수도 있으며, 인종이나 성별에 따라 다르게 경험되기도 하지만 이 보고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으로 한데 묶였다. 즉 정상성은 보이는 것만큼 그렇게 압도적으로 지배적이지 않다는 사실이다. 이 보고서의 숫자들은 장애가 내적 또는 외적 원인에 의한 일상적인 경험이자 무한히 다양하고, 창의성과 비통함으로 가득 차 있으며 어디를 가든 사회적 위험성을 안고 있는 우리 삶의 보편적인 한 부분임을 암시한다.
세상은 누구를 위해 지어졌는가? 나와 학생들이 어맨다와 함께 강연대를 제작하는 내내 던진 질문이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허식이 없고 독특한 어맨다의 브리프에는 세계적인 규모의 조사가 담겨 있었다. 어맨다는 상자나 계단형 발판, 그 밖의 다른 보조 기구를 사용해 얼마든지 쉽게 일반적인 강연대 앞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어맨다의 관심은 제품의 실용성을 넘어섰다. 유용성도 중요하지만, 디자인의 유의성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몸이 기존의 건설환경과 부적합 상태로 만나는 순간을 세밀하게 들여다보면서 처음으로 강연대를 제작할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그러나 어맨다는 단순히 자신을 도와줄 물건을 찾는 게 아니었다. 이 강연대가 일개 해결책으로서만이 아니라 질문으로서, 즉 물질의 형태로 디자인된 질문으로서 기능하기를 원했다. 공간에 적합하고 또 그곳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방에 들어오고,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거리로 향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교육을 받고 직장을 구해서 자리를 잡는 사람은 누구인가? 발판을 딛고 올라가 마이크에 대고 “제 말 좀 들어보세요” 하고 말하는 사람은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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