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는 ‘브리프brief’라는 것을 손에 들고 일한다. 브리프는 고객이나 공동작업자가 과제의 목적을 간단명료하게 제시한 문서로 건물, 놀이터, 제품 등 협업의 목표를 이루는 데 필요한 것들이 적혀 있다. 디자이너에게 주어진 과제를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실제 많은 사람이 그렇게 부른다. 그러나 디자인을 오직 문제 해결의 측면에서 접근하다 보면 핵심을 놓치기 쉽다. 좋게 말해 브리프는 수없이 많은 방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질문으로 채워져 있다. 브리프는 요구사항을 레시피 스타일로 적어둔 목록이 아니라, 디자인이 나아갈 길이자 상상의 결과물이며 목표를 향해 열린 자세로 작업하라는 권고문이다.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 불안할 수는 있겠지만, 내가 공대생에게 애써 가르치려는 것이 이런 종류의 생성적generative 만남이다. 디자인 팀의 작업이 시작되면 밑그림과 커피 컵이 널브러진 정신없는 작업대에서 제작과 회의가 끝없이 이어진다. 바로 그 안에 우리 앞에 놓인 도전이 있고, 목적지에 가기 위해 선택해야 하는 수많은 길이 있다. 팀은 실용적 디자인과 심미적 디자인을 두고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제 기능을 다하면서 서사까지 끌어낼 물건을 만드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 그 물건은 어떤 식으로 작용할까? 그게 왜 중요할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디자인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에 따르면 디자인에는 역사학자 존 헤스켓John Heskett이 “유용성과 유의성utility and significance”이라고 요약한 두 가지 요소가 모두 혼합되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은 일을 하는 도구로서의 실용성과 표현력을 모두 겸비해야 한다는 주장을 간결하고 상식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디자인에 요구되는 이 두 덕목은 소위 매머드급 과제다. 제대로 작동하는 것은 기본이고 우아한 존재감과 다루는 맛이 있으며, 편리하고 튀지 않고 저렴하면서도 사용자로 하여금 선뜻 집어들게 하고, 또 뭔가 생각하게 하는 매력 넘치는 물건을 만드는 게 과연 쉬운 일일까? 하지만 이런 버거운 조합은 많은 사람이 디자인에 흥미를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디자인은 그저 기능이 더 뛰어난 쥐덫better mousetrap(매력적인 신제품을 뜻하는 말이지만 주로 기업의 제품 중심적 사고를 꼬집는 표현으로 쓰인다-옮긴이)을 만드는 임무도, 닥치는 대로 시도하는 실험도 아니다. 휴대전화 케이스나 토스터 오븐을 위한 참신하고 번드르르한 배색의 문제만도 아니다. 디자인은 저것들을 다 요구한다. 유용성과 유의성을 제대로 혼합하려면 저울질을 잘 해야 하고 적절한 기회도 있어야 한다. 결코 만만치 않은 조합이다.
어맨다가 제시한 브리프는 비교적 구체적이고 평범했지만 보철 디자인 맥락에서는 굉장히 참신했다. 내 수업을 수강하는 공대생들은 어디까지나 기술 자체만을 염두에 두고 수업에 들어왔고, 의수나 의족, 보청기나 길잡이용 지팡이처럼 감각 장애를 교정하는 장비에 관심이 있었다. 수업 초반에 이야기를 나눠보니 학생들은 배운 기술을 이용해 치료 차원에서 신체 기능을 복원하는 도구를 제작할 생각이었다. 이들은 함께 작업할 사람들을 위해 재능을 기부하고 그 과정에서 작은 것이라도 배울 수 있는 만남을 기대했다. 당연히 내 수업이나 연구실에서도 그런 종류의 보철장치를 다룬다. 우리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이메일을 읽을 때 사용하는 초고속 문자-음성 변환 소프트웨어나 최신 디자인의 휠체어 등 최첨단 기술로 생산된 보철 장비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관한 기사를 읽거나 그들과 직접 만나서 이야기한다. 어쨌거나 이 수업은 공학 수업이고, 이곳에서 기술은 모어母語이자 우리가 물려받은 학습 방식이다. 그러나 보조공학에 따뜻한 영웅주의가 추가되면 효과가 증폭된다. 장애의 경험에 기계의 기능이 감성적으로 결합한 사례가 강조되는 것이다. 그러면 학생들은 주어진 과제를 어디까지나 공학 중심으로 생각하면서, 망가지고 결함 있는 몸을 치료하고 암묵적으로는 죽음까지 방지하는 도구를 만들어 문제를 해결한다고 확신하기 쉽다. 이런 류의 기술 이야기가 그렇게 인상적인 것도 그래서이다. 눈앞에서 도움과 보조의 깃발이 휘날리고 있으니 당연하다.
그러나 어맨다의 브리프는 부분적으로 그런 기대를 뒤엎었기 때문에 나와 학생들 모두 거부할 수 없이 끌려들어갔다. 어맨다가 원하는 것은 제 몸을 고치거나 교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어맨다는 조금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독자가 굳이 고집한다면, 어맨다의 강연대를 두고 순수한 보철장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보조는 어디까지나 어맨다가 바라는 선에서만 만족스러울 것이다. 우리는 있는 힘껏 상상해야만 하는 물건을 주문받았다. 도구와 건축물 사이에서 기존의 지어진 세계가 배열되는 표준 규격을 단호히 거부하고, 어맨다의 몸과 공간이 전과는 다르게 만나는 방법을 제안해야 했다.
아마도 학생들은 이 프로젝트를 하나의 사고실험이자 해당 학기의 기억에 남을 만한 매력적인 과제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몇 주, 몇 달이 지나면서 이들은 어맨다의 브리프에는 의뢰인을 넘어서는 의미가 있음을 알았다. 이 강연대는 어맨다라는 한 사람만을 위해 제작된 유일무이한 물건이지만, 프로젝트 전체는 우리 몸의 모든 것, 수업에 참가한 학생 각자가 자신에 대해 새롭고도 생산적인 방식으로 생각하게 하는 숨은 의미를 가르쳤다. 어맨다는 질문을 던졌고, 우리도 같은 질문을 하도록 가르치고 있었다. 이 세상은 누구를 위해 설계되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