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몸은 제 주위의 건설환경built environment(자연환경 이외의 모든 인공적인 환경을 가리키는 용어-옮긴이)과 매일 불화하며 살아간다. 우리 몸은 계단과 싱크대, 지하철 승강장 같은 장애물을 때로는 쉽고 우아하게, 때로는 힘겹고 서투르게 지나간다. 이렇게 보면 모든 장기를 끌어담고 꾸역꾸역 목적지를 향하는 우리 몸뚱이는 기적이자 일상이다. 어쩌면 당신은 날카로운 칼을 다루면서 그 그립감을 즐길지도 모르고, 사무실 의자에 앉거나 일어설 때 자기도 모르게 움찔하며 놀랄 수도 있다. 출입구와 시설물 주변의 혼잡, 붐비는 거리에서 서로 부대끼는 사람들의 소란스러운 움직임을 저 위에서 내려다보면 수백만 배로 증폭된 춤, 끝없이 펼쳐지는 안무가 보이리라. 우리가 건설환경을 만나는 방식은 몸과 세상, 둘 모두에 달린 문제이다. 어느 누구에게나 완벽하게 맞춤한 해결책은 없다. 하지만 우리 몸이 물체를 만날 때 살갗이 금속과 콘크리트, 플라스틱과 접촉하는 순간의 영상을 느리게 재생할 수 있다면 그 안에 꼭꼭 채워진 정보들이 보일 것이다. 이 사실을 어맨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추위가 매서웠던 1월의 어느 날, 내가 일하는 보스턴 외곽의 대학 캠퍼스로 그가 찾아왔다. 어맨다는 그 학기에 개설된 내 디자인 수업에서 20여 명의 공대생과 협업하기 위해 초대된 첫 손님이었다.
어맨다는 미술사학자이자 현대미술 큐레이터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주로 이주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말투에는 고향의 억양이 남아 있었다. 현대미술에 종사하는 사람답게 기하학무늬의 옷을 입고 학생들 앞에서 편안하게 이야기하는 모습에서 전문가다운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어맨다는 ‘작은 사람’, 저신장 장애인이다. 120센티미터 남짓한 키는 평균 신장의 범위에서 한참 벗어난다. 강의실에 등장한 어맨다는 이 강의의 커리큘럼 자체였다. 공간의 규모, 전등 스위치의 높이, 전기 콘센트의 위치, 책상과 의자 크기까지, 그의 존재가 여느 평범한 강의실을 새삼스러운 눈으로 보게 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생소하다는 듯 주위를 돌아보는 학생도 있었다.
어맨다는 노트북에 준비해온 슬라이드를 보여주며 예술가나 박물관과 협업하여 전시에 생기를 불어넣는 일 등 전반적인 큐레이터의 업무를 시각적으로 설명했다. 작품을 일반적인 높이보다 낮게 설치하여 저신장 장애인은 물론이고 휠체어를 탄 사람이나 아이들도 쉽게 볼 수 있게 시도한 현대사진전을 예로 들기도 했다. 학생들은 어맨다가 하는 일뿐 아니라 평소의 일상과 이 세상에서 그의 몸이 겪는 일에도 궁금증을 품고 있었다. 어맨다는 단순한 초청 강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와 함께할 아이디어를 들고 왔다. 어맨다 자신과 나, 그리고 학생들이 참여할 프로젝트에 대한 제안이었다. 어맨다는 가구 한 점을 의뢰했다. 어맨다의 직업과 신체적 특수성에서 기인한 필요를 충족할 도구, 즉 강연대였다. 미술관에 전시를 보러 온 관람객을 환영하거나 발표할 때 사용할 단상이다.
강연대는 뜨거운 분위기에 어울리는 물건이다. 점심 일정이 늦어지기 전에 행사를 마무리하려고 진행자가 마이크를 두드리며 청중을 조용히 시키는 그런 곳에 어울리는 가구다. 졸업식, 판촉 행사, 세미나, 설교 등 수많은 공식 의례에서 확실한 보조 기능을 하기 때문에 따로 언급할 가치도 없어 보인다. 전 세계 호텔 회의실과 강당의 평범한 배경의 일부로서 천편일률적인 형태를 하고 놓여 있는 강연대가 얼마나 많을지 상상해보라. 하지만 강연대는 또한 그 뒤에 서게 될 사람에 대한 기대상을 물체의 형태로 가감 없이 보여주는 사물이기도 하다. 강연대는 이 세계가 신장 150센티미터 이상인 사람들을 위해 설계되었다고 말한다.
어맨다는 제 키에 맞는 강연대를 원했다. 일반적인 강연대 뒤에 별도로 장비를 설치해 공간의 어색한 규모에 매번 제 몸을 맞춰야 하는 불편함 없이 강연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 별도의 장비라는 게 보통은 작은 발판 같은 것이겠지요?” 어맨다가 우리에게 말했다. 평생 그런 식으로 적응해왔지만 더는 그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어맨다는 보다 유연한 디자인을 원했다. 대학원 석사 논문 발표 때 사용하려고 그는 바퀴 달린 원목 강연대를 주문한 적이 있다. 그날의 발표에 쓰기에는 더없이 만족스러웠지만 무거워서 휴대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디자인을 찾아 우리 수업에 온 것이다. 새 강연대는 높이가 어맨다의 키에 맞아야 한다는 기본 조건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기능을 수행해야 했다. 출장 갈 때 가지고 다니려면 간단한 형태로 접히고, 우아하고 단순한 조작으로 설치할 수 있고, 들고 다니기 쉽도록 가볍고, 종이를 올릴 수 있게 넓어야 하고, 노트북과 물병의 무게를 버티고 여러 번 사용해도 망가지지 않을 만큼 튼튼해야 했다. 기성품 중에서는 이런 조건에 맞는 물건이 없었다.
학생들은 이 도전의 기술적 제약에 이내 관심을 보였다. 추운 겨울 아침 수업인데도 강의실이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나 기술적 조건 외에도 학생들이 알아야 할 것이 더 있었다. 어맨다는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고disabled 말한다. 다른 능력을 갖췄다거나differently abled, 특수한 어려움을 겪는다는specially challenged 식으로 돌려 표현하지 않는다.* 다른 장애인처럼 어맨다도 장애라는 말을 스스로 선택해서 사용하고, ‘왜소증dwarfism이 있는 사람’이라는 표현보다 선호한다. 장애가 있다는 말은 어맨다에게 자신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 전혀 아니다. 어맨다는 자신을 장애인으로 만드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거침없이 말할 것이다. 그는 매일 수십 가지 방법을 동원해 기존의 건설환경에 맞춰서 살아야 한다. 그의 몸이 이 세상을 만나는 방식이 바로 어맨다를 장애인으로 만들고 있다. 또 어맨다는 자신에게 장애가 있다는 말이, 어맨다 자신과 비슷하든 아니든 기존의 ‘지어진 세계built world’와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몸을 가진 다른 이들과 그 불화의 경험을 공유한다는 뜻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비장애인 학생이라면 오래 숙고해야 이해할 수 있고, 겉으로 드러나든 아니든 장애가 있는 학생은 늘 인지하고 있는 미묘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예상치 못했던 언어가 예상치 못한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어맨다의 몸을 방에 맞추는 도구가 아니라, 반대로 일시적으로나마 방을 어맨다에 맞추는 도구였다.
학생들은 당연히 보철장치, 즉 보조기술 장치의 설계와 제작에 자신의 공학 실력을 발휘할 요량으로 이 수업을 신청했다. 보철장치란 몸이 정상적인 기능의 범위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위한 도구와 장치를 말한다. 학생들은 이 수업을 자신이 지금까지 배운 모든 기술을 적용할 좋은 기회로 보았다. 복잡한 수학 방정식, 목재와 금속으로 실습한 기술들, 물리적 세계의 밑바탕을 이루는 아름다운 문법으로서 자신이 아는 역학 원리를 총동원할 생각이었을 것이다. 어맨다와의 첫 회의에서 학생들의 마음은 이미 질주하고 있었다. 의뢰인은 풍선처럼 부푸는 강연대를 기대할까? 아니면 원터치 텐트처럼 자동으로 프레임이 펼쳐지는 스타일? 학생들은 어디까지나 선의를 실천하고자 직접 물건을 제작할 기회를 찾아 이 수업을 신청했다.
그러나 어맨다는 학생들의 계산에 없던 존재였다. 그는 노련한 대중 강연자로서 강의실을 휘어잡았다. 그리고 이 강의실에서 제 몸 그대로의 편안한 상태로 우리에게 단 하나의 특별한 의뢰를 했다. 어맨다는 당연히 쓸모 있는 물건을 원했다. 그러나 그 물건의 조건에는 단순히 기술적인 항목만 있지 않았다. 그 요청은 어맨다의 소망에서 나왔다. 미미하게나마 세상의 모습이 지금보다 유연해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바람에서 시작된 상상력의 소산이었다. 선의를 가진 학생들이 막연히 짐작했던 것과 달리, 어맨다가 원하는 것은 의료기기로서의 보철장치가 아니었다. 어맨다는 오직 소수만 공유하는 특수한 상황에 맞는 물건을 함께 만들자고 제안했다. 키가 작은 사람을 위한 강연대. 한 사람을 위한 맞춤형 디자인이다. 적어도 처음 볼 때는 그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