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는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다.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지구상에 몇 없는데, 대부분은 그와 만났던 남자다. 그와 연애 관계에 있지 않으면서 그의 정체성을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뿐인데, 바로 나다.
S는 내게 털어놓은 게 최초의 고백 경험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너무 아팠다.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비둘기를 좋아하든 토끼를 좋아하든, 그게 뭐라고 이 나이 먹도록 자신을 감추고 살았나.
몇 해 전에 서울 시청에서 열린 퀴어 축제를 구경 갔던 적이 있다. 퀴어 축제에서는 어떻게들 노나 궁금해서 가봤는데, 흥겨운 노래와 춤, 유쾌한 유머와 웃음이 어우러진 활기 넘치는 행사였다.
내가 여기에 있다
시청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축제 부스를 구경하다 발견한 글귀였다. 여기에 참석한 많은 사람은 자기 정체성을 언제부터 숨기고 살아야 했을까? 이성애자가 규정해놓은 ‘정상’과 ‘비정상’이라는 틀 속에서 얼마나 무시당하고 상처받아 왔을까? 학교 선생님께 털어놓자 감수성 풍부한 시절에 겪는 착각이라고 일축했다는 이야기, 부모님께 말했더니 정신병원에 가자고 했다는 이야기,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지 않기로 결심한 뒤로는 친척들을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 등…. 나는 그런 얘기들을 떠올리며 ‘내가 여기에 있다’라는 일견 무덤덤해 보이는 이 글귀가, 실은 얼마나 절박한 호소인가를 생각했다.
S는 내게 커밍아웃을 한 뒤 다른 어떤 사람에게도 그 사실을 털어놓지 않았다. 친한 친구들한테는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냐고 물었더니, 친한 친구들이란 놈이 툭하면 성소수자 혐오 발언을 한다고 했다. S는 그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도 모르게 “어휴, 그 게이 새끼들”이란 표현을 쓴다고 했다. 당당히 자신을 밝히지 못하는 문제보다, 무리에 끼지 못하는 게 더 걱정인 그 마음이 어쩔 수 없이 이해가 되었다.
그 문제만 빼면 S는 평범하게 잘 산다. 돈 없고, 집 없고, 가족 문제 끊이지 않고, 회사에서는 압박 심하고, 고객은 늘 진상이라고 한다. 우리 모두와 별반 다르지 않게 산다는 얘기다.
만나서 술을 한잔하고 헤어질 때면 S는 늘 고맙다고 말한다. 그러면 나는 S를 꼬옥 안아준다. 그렇게 하여 작은 우리만의 세계를 힘겹게 만들어낸다. 혐오와 차별이 범람하는 이 거대한 세계 속, 고맙다는 인사와 포옹으로 만든 우리만의 작은 세계.
나는 그로부터 좋은 소식을 기다린다. 애인이 생겼다는 소식보다는, 안심하고 속내를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겨서 다시 커밍아웃했다는 류의 소식을 기다린다. 우리의 작은 세계가 좀 더 확장되었다는 소식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