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난해한 혈액검사들은 모두 ‘이상 없음’으로 나왔다. 긍정적으로 보면, 혈액검사로 알아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질환을 깨끗이 배제한 것이고, 부정적으로 보면 내 몸 어딘가에 이상이 있는데도 더는 시도해볼 검사가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내 몸의 이상은 이미 다리가 심하게 떨리는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나는 멕시코에 있는 마야 피라미드 사원의 계단을 오르는 것도 생사가 달린 문제일 정도로 쇠약해졌다.
처음 증상이 나타나고 6개월 후, 오른발 일부에 생긴 마비는 이제 무릎까지 올라갔다. 게다가 마비는 좌우대칭의 양상을 띠었다. 즉, 오른쪽 다리에서 증상이 나타나면 왼쪽 다리에도 그대로 되풀이되었다. 어느 날 프랜시스와 함께 노르웨이의 피오르fjord를 탐방하면서 나는 내가 눈에 띄게 절뚝거리며 걷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영국으로 돌아와보니, 담당 의료진은 수만 늘어났을 뿐 내 병에 대해서는 여전히 알아낸 게 없는 듯했다. 그래도 제외된 병명의 목록이 엄청나게 길어졌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진단을 내리지 못해 점점 더 난처해진 의사들은 차선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들은 희귀한 증상에 걸맞은 인상적인 병명을 붙이기로 무언의 합의를 했다. 그때부터 내 공식적인 병명은 ‘강직성 하지마비spastic paraparesis’로 기록되었다. 쉽게 말해, 다리 근육이 경직되면서 부분적으로 마비가 왔다는 뜻이다.
이 명칭은 학창 시절 같은 반 친구였던 포스터와 그 패거리를 재평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포스터와 소수지만 목소리가 큰 그의 추종자들은 나를 ‘발작하는 호모queer spastic’라고 불렀다. 당시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조롱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희귀한 경련’이라는 뜻도 있으니 너무나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이 무렵 프랜시스와 함께 외출할 때면 그가 비틀거리는 내게 팔을 빌려주는 일이 점점 잦아졌다. 나는 거기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어른이 되고부터 줄곧 인생을 함께한 커플이 보이는 무의식적인 제스처로 치부했다. 실제로 나처럼 남편을 붙잡고 걷는 할머니들의 모습을 자주 보았고, 내 부모님도 그랬으니까.
그렇다 해도 당시 부모님은 90대였다. 나는 아직 50대였고, 더구나 겉으로는 멀쩡해 보였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연민의 표정이나 언뜻 스치는 혐오를 느낄 때마다, 나는 그들이 우리 둘을 벤치를 향해 바닷가 산책길을 걷는 노부부처럼 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장년의 게이 커플로조차 보지 않았다. 사실은 우리를 커플로 여기지도 않았다. 프랜시스는 이제 어느 모로 보나 내 간병인이었다. 불과 몇 달 만에 나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것이 ‘장애인’ 대열에 끼게 된 나의 첫 경험이었다.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적어도 넉 달이 걸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지나가는 일시적 증상은 아닌 듯했다. 장애인의 힘든 생활을 조금 체험한 후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죽 이렇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용기를 내어 절친한 친구(물론 프랜시스)에게 내가 장애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게다가 심각한 장애일 수도 있다고. 프랜시스는 이미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천만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도 큰 문제였다. 우리는 우리 앞에 가로놓인 무지와 편견에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맞설 결의를 다졌다. “다리에만 문제가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너스레를 떨면서 말이다.
장애인임을 커밍아웃하는 것은 게이임을 커밍아웃하는 것과 큰 차이가 있었다. 모두가 대체로 친절하게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싫을 것도 없잖아?’ 하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지중해의 이비자Ibiza섬에서 이 특별한 이타적 인간애를 몸소 체험하게 되었다.
그때 프랜시스와 나는 자동차가 분주하게 오가는 도로의 횡단보도를 아주 느린 속도로 건너가고 있었다. 프랜시스의 팔을 붙잡은 내가 아직 건너고 있을 때, 활기 넘치는 청춘들의 속도에 맞춰진 신호등이 공격적으로 삑삑거리며 우리를 재촉했다. 반쯤 건넜을 즈음에는 우리와 동시에 길을 건너기 시작한 무리에서 한참 뒤처져 있었다. 우리와 함께 도로에 남은 사람은 검은 상복을 입은 주름진 노부인뿐이었다. 우리 앞에서 걷고 있던 노부인은 차에 깔리기 전에 길을 건너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처럼 보였다.
이때 신호등이 바뀌었다. 차들이 일제히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려왔고, 스쿠터 두 대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아직 노란불인데도 나를 향해 경쟁하듯 무섭게 달려왔다. 우리와 함께 길을 건너던 (이 고장의 냉엄한 교통 사정에 익숙한 사람임에 틀림없는) 노부인이 이 순간 어떻게 했을까? 거북이가 갑자기 전력 질주하듯 속도를 냈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폭주하는 스쿠터가 뒤따라오는 우리를 치든 말든 우리보다 빨리 건너가기만 하면 되니까.
하지만 노부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자동차 소리가 점점 시끄러워지는 가운데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쪽을 돌아보더니 내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그러고는 프랜시스와 함께 나를 안전하게 에스코트했다. 마치 불청객을 데리고 나오는 보안 요원처럼 당당했다. 나를 길 끝까지 무사히 데려다준 노부인은 프랜시스를 보고 이가 빠진 잇몸이 드러나게 히죽 웃었다. 그러곤 스페인어로 몇 마디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나와는 한 번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이 일은 내게 분기점이 되었다.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인생의 중대한 전환점을 두 개나 통과한 셈이었다. 하나는 타고난 머리 덕분에 적어도 존재 자체는 받아들여지던 내가 이제는 존재조차 인정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고, 또 다른 하나는 왜소한 할머니의 손을 빌려 길을 건너야 하는 단계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뭔가 방법을 찾아야 했다. 나는 가장 먼저 도구의 도움을 받는 방법을 떠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보행 보조장치는 이미 빅토리아 시대 말 신사들의 지팡이에서 정점에 도달했음을 알았다. 그 지팡이의 우아하면서도 정교한 디자인을 능가하는 건 없었다. 영국에 돌아온 후 물리치료사에게 부탁해 국립보건서비스NHS에서 제공하는 보행 지팡이를 빌렸을 때 그 점을 확실히 깨달았다.
그 지팡이는 기본적으로, 길이를 조절할 수 있는 굵은 알루미늄 파이프였다. 꼭대기에는 딱딱한 회색 플라스틱 손잡이를 달았고, 끝에는 커다란 고무 덮개를 끼웠다. 그것은 놀랍도록 무거운 데다 안정감이 없어서 조금만 체중을 실으면 손잡이가 흔들렸다. 전체적으로 볼 때 아르바이트 배관공이 디자인한 것처럼 형편없었다.
지팡이를 잡고 흔들자 파이프 안에서 달그락 소리가 났다. 그것을 짚고 걸을 때도 딸깍 소리가 났다.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것은 애처롭게 삐걱거리는 것이었다. 그 디자인을 승인한 이는 그것을 실제로 사용할 일이 없는 사람이었음이 틀림없다. 반면에 내가 방금 구입한 흑단 지팡이는 손잡이 부분이 은이고 오래된 것이지만 완벽한 안정감을 주었다. 그것은 셜록 홈스 시대의 디자인으로 세련되고 점잖은 소리가 났다. 120년이 지난 지금의 보행 보조기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었다. 현대의 보행 지팡이는 (생김새는 그렇다 치고) 제대로 작동하지도 않았다.
지팡이를 들고 처음 산책을 나간 날은 내게 매우 상징적인 순간이었다. 나는 실제로 남들을 약간 의식하며 걸었을 것이다. 아니면 단지 다리를 절뚝거렸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이든, 나는 이제 누가 봐도 장애인이 분명했다. 실제로 행인들은 나를 흘깃 쳐다보았고, 눈이 마주치면 미소를 지었다. 지팡이라는 신분증의 효과는 놀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