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에는 악당보다는 영웅이 훨씬 많다. 최악의 장본은 척수성 소아마비라는 바이러스이며,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여러 사상자 중 한 명이라는 사실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1951년 여름, 그 바이러스의 눈에 내가 들어왔을 뿐이라고 믿는 게 다였다. 질병을 악마로 묘사하고 싶지 않다. 박테리아나 세포 돌연변이가 마치 악의를 품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나뭇잎은 떨어지고, 바이러스는 침범하고, 사자는 먹잇감을 쫓는 삶의 행진이 만드는 부수적 피해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 앞에 놓인 존재에 난폭한 영향을 미치더라도 말이다.
수년간 사람들은 소아마비 때문에 너무 화나지 않냐고 묻곤 했다. 처음 들었을 때도 참 이상한 질문이라고 생각했고, 아직도 누군가 그렇게 물으면 놀란다. 이러한 반응만으로도 내가 소아마비를 삶의 한 조각으로 온전히 받아들였다는 걸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소아마비에 걸리지 않았거나 그 영향을 받지 않은 세월이 단 몇 개월에 불과하니, 말하자면 소아마비가 나의 기준점인 셈이다. 밀고 나가야만 했던 벽이다. 모두에겐 그런 벽이 하나씩 있다.
이뿐만 아니라 새로운 진단을 뒤늦게 받은 데 분통 터지지 않았냐는 질문도 받았다. 고관절이 망가지는 증상이 나타난 뒤 적어도 10년을 더 그렇게 보냈는데 억울하지 않냐고. 내 대답은 ‘아니오’인데 단지 용감해 보이려고 이렇게 답하는 건 아니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건 수년간 AA 모임에 참석하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은 시간 덕분인 것 같다. 이야기는 끔찍할 수도, 비통하고, 두렵고, 절망으로 가득할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이야기를 빙빙 돌려 하지 않는 것이다. 질질 끌면서 돌려 이야기하는 건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 자체의 목적을 헛되게 한다. 당신은 이야기를 바꿀 수 없다. 어느 날 오른쪽 대신 왼쪽으로 돌아가거나, 어떤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다음날의 삶을 구할 수는 없다. 우리에겐 그런 선택권이 없다. 당신을 여기 있게 한 건 바로 그 이야기며, 그 이야기의 진실을 받아들여야만 결과를 견딜 만해진다.
그러니 여기에 분노는 없다. 열두 시간씩 일해가며 내게 코르티손 주사를 처방하거나 엑스레이 촬영 대신 다른 소견서를 써준 레지던트나 물리치료사 혹은 내과 전문의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 작고 부차적인 줄거리 천 개가 모여 내가 필요한 걸 얻지 못한 날이 되었고, 그중 대부분은 내 권한 밖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그러다가 래니어 박사와 매팅리 박사를 만났고, 내 말을 듣고 관심을 기울이고 옳은 조치를 해준 모든 이를 만났다. 이것이야말로 이야기의 극적인 전환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기적을 너무 믿지 않는다. 기적은 현란하지만 실증적 근거는 희박해 불빛을 오래 지속하지 않으니까. 대신 나는 느린 경로를 택할 것이다. 하루에 사과를 한 개씩 먹으며 다리 들어 올리기를 천 번 해낼 것이다. 당신은 하늘을 가르는 천둥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래야만 천둥에 동반하는 빛의 쇼를 보게 된다. 그렇게 당신은 광채의 증인이 되고, 기다리며 지켜보는 법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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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뉴트리나’라고 부르는 크리스와 함께 체육관 로비에 서 있었다. 크리스의 우아함과 힘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뻗어가는 나무를 연상하게 된다고 그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렇게 우리 둘 사이에는 ‘뻗어가는 나무’라는 암호가 생겼다.
물리학 교사인 크리스에게 가속도에 관해 물어보았다. 헤엄치거나 걷다가 특정 속도와 능률에 이르면 왜 가속도가 붙어서 저절로 나아가지는지를 말이다. 어린아이가 이 땅의 명백한 진실을 알아내듯 나도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트에서 몇 번 그리고 수영장에서, 나의 다리가 나를 앞으로 보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튼튼해진 덕분이었다. 땅에서는 더 이루기 힘든 승리였다. 몇 개월 동안이나 마치 물속에서 걷듯 느릿느릿 힘겹게 걸었다. 희망과 패배, 희망과 패배가 이어진 계단이었다. 그렇게 수만 번을 걷고 또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조금 빠르게 걷기를 시도했는데, 빠르게 걸으니 더 쉬웠다. 당황스러웠다. ‘게일의 법칙’에 따르면 모든 것은 힘겹게 이뤄내야만 하는 법이었다. 크리스 앞에서 천천히 걷는 시범을 보이고 난 뒤 빠른 걸음으로 걸어봤다. 그러자 크리스가 나를 따라 했다. 조심스럽고 느린 걸음을 흉내 내며, 내가 문제를 양쪽으로 밀어내느라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내가 속도를 높이자 걷기란 원래 그런 거라고 했다. 앞으로 나아가며 땅을 밀치는 행위라고 말이다. ‘게일의 법칙’보다 ‘뉴턴의 법칙’을 훨씬 더 선호했던 ‘뻗어가는 나무’가 내게 말했다. “세상을 디디면 세상이 자기를 밀어줄 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