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 #4 #영.레터 09.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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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구독자 님. 힘찬 한 주 보내고 계신가요? 내부 사정으로 메일 발송이 하루 늦어졌습니다. 기다리셨을 구독자 님께 사과드립니다.
게일 콜드웰Gail Caldwell의 에세이,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를 보내드리는 영.레터의 네 번째 시간입니다. 지난 메일에서 콜드웰의 반려동물에 대해 이야기했다면, 오늘은 또 이 에세이의 중요한 한 축인 고관절 치환 수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인생이 바뀔 것이 예견되는 일 앞에서 태연하고 차분하기 쉽지 않을 것 같지만, 콜드웰은 그 누구보다 차분하게 수술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라고 무섭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콜드웰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비록 겁먹었음에도 공포 속으로 걸어갈 나 자신을 잘 알았고, 내게 일어날 일에서 도망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껴안고자 했다."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은 다음 주에 여러분을 뵙기 위해 마지막 준비중입니다. 다음 영.레터는 다음 주 월요일에 에세이를 조금 더 이해할 수 있는 글과 함께 발송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
- 담당자 J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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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술 몇 주 전 내 삶은 체계적인 조직도처럼 오래도록 꿈꾸던 모습이었다. 내야 할 세금을 미리 착착 내고 체육관의 회원권 이용 기간을 보류했다. 튤라에게 필요한 예방접종을 모두 맞혔고 치과에 가서 내 치아도 점검받았다. 냉장고에 꽤 먹을 만한 즉석조리 식품을 가득 채워넣었다. 바닥에 깔려 있던 (목발에 치명적인) 조그만 러그를 둘둘 말아 정리했고, 화초를 실내로 옮겼으며, 튤라의 털을 다듬고, 식료품 저장고를 가득 채웠다. 두꺼운 소설책 다섯 권과 이부프로펜 및 레몬 탄산수를 부족하지 않을 만큼 충분히 사서 적십자 텐트처럼 꾸렸다.
공중보건 전문가인 친구 도나Donna가 뉴잉글랜드 침례병원에서 운영하는 고관절 전치환술 수업을 들으러 함께 가주었다. 교실에 들어가 대퇴부뼈 모양인 볼펜을 받았다. 수업 내용을 네 페이지나 받아 적었다. 수술실 간호사와 물리치료사 및 작업치료사의 강의를 들으며 수술받은 뒤 침대에 눕고 일어나는 방법, 계단을 오르내리는 방법, 목발을 짚고 생활하며 식판을 목에 걸고 식사하는 방법 등을 배웠다. 그 자리에 모인 마흔여 명은 40대 중반부터 8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였지만 동지애가 형성되었다. 그중 가장 젊어 보이는 남성 한 명은 자신이 마흔다섯 살이며, 수술받은 뒤 회복하는 시기를 대비해 지난 2년간 세 군데서 돈벌이를 했다고 했다.
나는 ‘게일의 친구들’이라는 제목으로 목록을 작성했다. 내면의 안정을 위한 것이기도 했고 나의 안부를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러고는 내가작성한 목록을 보았다. 이웃과 반려견 덕분에 친해진 사람들, 함께 조정하던 이들과 작가, AA 모임 사람들 그리고 체육관에 다니는 여성들이 목록에 있었다. 말하자면, 당신이 꾸린 작은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 필요한 요리사, 목수, 치료사가 목록에 다 있는 것이다. 토네이도가 몰아칠 때 당신이 살려달라고 외쳐도 될 만한 용감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당신이 불길을 헤집고 걸어가 구해내고 싶을 만큼 가슴을 벅차게 하는 이들이기도 하다. 마치 신께서 말씀하시는 듯했다. “네가 아는 놀라운 사람들의 이름을 다 써보거라.” 그들은 바로 의리 있고 애정 넘치는 내 친구들이다. 이제 얼마나 진실인지를 알아낼 일만 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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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말에는 서른 번의 조정 연습 횟수를 다 채웠다. 벌써 스물다섯 살이나 먹은 반두센 보트를 잘 씻어서 창고에 두며 다시 돌아오겠다고 큰소리로 말했다. 수술은 11월 중순으로 잡혔는데, 10월 초에 매팅리 박사 측에서 3주 정도 앞당겨도 괜찮겠냐고 전화로 물어와 일정을 조정했다. 새로 잡은 수술 날짜는 내가 곧장 수술 준비의 모든 두려움 속으로 뛰어듦을 의미했다. 핼러윈 아침에, 즉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연휴에 수술을 받는다는 사실이 좋은 징조로 느껴졌다. 내가 뉴잉글랜드 침례병원에서 지내는 동안 튤라는 샤일로, 피터, 팻과 함께 집집마다 사탕을 받으러 다니겠지. 사전 검사를 위해 방문한 병원에서 다섯 시간을 머물며 추가 엑스레이 촬영과 CT 촬영을 하고 혈액 채취 과정을 마친 뒤, 사회복지사와 작업치료사, 약사를 만나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 수술 직전 이틀은 살균 용액으로 골반과 다리를 씻었다.
(중략)
그때 받은 모든 조언과 응원 중에서 수술 뒤에도 계속 생각난 말은, 평소 자신의 거친 모습을 내보이기 좋아하는 한 젊은 남성의 말이었다. 수년 전 어깨 수술을 받은 그는 내가 작별 인사를 하러 모임에 간 날 밤, 평소와 다른 태도로 나가는 길에 내 등을 두드리며 말했다. “재활이 지긋지긋할 거예요. 그래도 이겨내야 해요.” 수술한 뒤 몇 주간 운동하느라 녹초가 될 때마다 리처드Richard의 말은 내게 자극이 되었다.
두어 가지 이유로 두려움이 증폭되었다. 우선은 소아마비로 근육과 신체 구조가 이미 망가진 상태로 수술실에 들어가야 한다는 점, 다음으로는 그 누구도, 의사도, 물리치료사도, 심지어 초능력자도 내가 수술받은 뒤 얼마나 회복할지 확실하게 예상치 못한다는 점이었다. 검투사의 고관절과 다리로 무장하고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퇴행이 진행되고부터 지난 20여 년 동안 힘과 유연성과 인내력도 뚜렷하게 감퇴했다. 이제는 계단을 오를 때 난간을 붙들고 한 다리로만 올라갔다. 왼쪽 다리가 걷는 일을 도맡았고, 오른쪽 다리는 너무 약해져서 왼쪽 다리를 뒤따라가는 회전축이나 지팡이 정도의 역할만 했다. 근조직이 겨우 뼈대를 잡아주고, 골반을 지탱할 받침대는 아예 무너져내린 상태였다.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소아마비 때문에 골반이 손상되면서 이 지경이 됐을까? 아니면 고관절염으로 근손실이 생긴 것일까? 몹시 중요한 문제였다. 어느 쪽이 먼저냐에 따라 수술을 받은 뒤 얼마나 강해질 수 있는지와 회복 가능성도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잘 걷게 될지 말이다. 수개월간 알 수 없을 터였고, 모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어떤 의사나 예후보다도 이 점을 잘 알려준 대상은 바로 내 다리였다.
불안의 또 다른 원인은 이제껏 수년간 어떻게든 현실을 부인하면서까지 끌고 온 것을 저버린 데 있었다. 매팅리 박사의 병원에서 집중 훈련을 받은 첫날 이후, 이제 이 과정에 수반되는 것을 정확히 알고 싶었고 상황을 받아들일 만한 정신 상태를 갖추었다. 왼쪽 다리에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며 여러 신랄한 공격으로 고통받아온 오른쪽 다리를 그동안 얼마나 과잉보호했었는지 점점 깨달았다. 나는 무자비하게 앞으로 밀고 나가는 사람이었다. 더 멀리 헤엄쳐가고, 열심히 일하며,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면 말이다. 일이 잘 풀릴 때조차도 내면의 목소리는 지독하고 억센 코치처럼 굴었다. 그러나 내 오른쪽 다리만큼은 엄격한 판단에서 제외되었다. 다행이긴 했으나 그 이유를 잘 이해하진 못했다. 마치 오래전에 떨어져나간 곳에 오두막 아니면 분쟁 없는 구역이 생겨난 듯했다. 그곳에서만큼은 상처 입은 내 다리가 무료 통행권을 쥐고 있었다.
이제 기적을 행하는 낯선 무리가 나를 마취시킨 뒤 대퇴골 꼭대기를 톱으로 잘라내고 새로운 전투용 마차를 달아주도록 허할 예정이었다. 나는 의학 저널 사이트에 소개된 도표를 보며 고관절을 맞춰넣는 작업의 복잡함과 수술 뒤 동작 범위를 이해했고, 충격적 경험에 반응하는 신체의 자연스러운 저항 반응에 관한 설명도 읽었다. 나는 비록 겁먹었음에도 공포 속으로 걸어갈 나 자신을 잘 알았고, 내게 일어날 일에서 도망치는 대신 그 모든 것을 껴안고자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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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하지도, 원하지도 않았던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찾아왔다.”
점점 병약해지는 나, 기운차게 성장하는 반려견,
그리고 인생의 두 번째 걷기 수업.
그 가운데 찾아온 고통과 사랑, 절실함과 희망,
그리고 새로운 시작에 대한
작가이자 평론가 게일 콜드웰의 에세이.
〈어느 날 뒤바뀐 삶, 설명서는 없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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