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 타짜
하늘은 높고 바람은 적당한 오후, 대학 캠퍼스 벤치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이십 대 초반의 나고, 다른 한 사람은 당시 여자친구였던 후배 혜정이였다. 혜정이가 말했다.
“이번엔 정말 가봐야 할 것 같아. 자주 있는 모임도 아니잖아.”
나는 최대한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어떻게 전 남친 있는 모임에 갈 수가 있니?”
캠퍼스의 초록 잔디가 물결처럼 흔들렸고, 혜정이의 머리카락도 살랑거렸다.
“오랜만에 한국 온 친구 때문에 다 같이 모이는 건 알겠어. 근데 그 자리에 네 전 남친이 나온다는데 내가 태평할 수가 있겠어?”
잠깐 아는 사람이 지나갔다. 저쪽에서 먼저 나를 알아보고 다가오길래 나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그는 눈치도 없이 우리 벤치 쪽으로 와서 별 시답지 않은 소리들(교수님이 오늘은 출석 체크 무조건 한댔으니 꼭 와야 한다는 둥)을 늘어놓은 뒤 떠났다. 그가 떠난 뒤 나와 혜정이는 잠시 침묵 속에 놓였다. 이윽고 혜정이가 침묵을 깼다.
“오빠 화났어?”
“아니야, 가도 돼. 모임도 나가면서 사는 거지.”
“정말이지? 고마워. 대신에 자주 연락할게. 한 시간마다 문자할게. 두 시간마다 전화할게. 세 시간마다 사진 찍어 보낼게.”
“대체 몇 시간을 있으려고?”
“오래 안 있어. 대신 오빠도 친구들 만나서 실컷 놀아. 사진은 안 보내도 돼.”
“아냐. 내가 갈 데가 어딨어. 그냥 집에 있을게.”
“집에서 뭐 하게?”
“그냥 내가 왜 이런지 좀 생각해봐야겠어. 왜 여자친구 마음 편하게 해주지 못하고 집착이나 하는지.”
“그러지 마, 그럼 내 마음이 너무 불편하잖아.”
“혜정아, 나 진짜 왜 이러지? 정신병인가? 네가 모임 나가면 모두 너한테 한눈에 반할 것 같고, 다들 추근댈 것 같아. 나 이상하지? 과대망상 같지?”
“(웃으면서) 오빠, 나 그 정도 아니야. 그리고 오빠 안 이상해. 좋아하면 질투하고 걱정하는 거 당연하잖아.”
“아니야. 좀 이상해. 나 옛날부터 그랬어. 나 지금 너랑 사귀는 거 되게 좋은데, 꼭 나쁜 상상을 해서 분위기 깨버리기 일쑤잖아. 이렇게 못난 사람이라 미안해, 혜정아.”
“오빠, 그러지 마.”
“혜정아, 나 숨을 잘 못 쉬겠어.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오빠, 왜 그래, 장난치지 마.”
“아니야. 진짜야. 스트레스가 갑자기 오면 이래. 혜정아 나 좀 붙잡아줘. 아, 아니다. 모임에 늦으면 안 되잖아. 괜찮으니까 가.”
“오빠….”
그날 혜정이는 결국 모임에 가지 않았다.
그날 밤, 혜정이와 둘이 학교 후문 근처에서 소주를 나눠 마시며 이런 대화를 했다.
“둘이 한잔하니까 좋다. 근데 계속 미안해. 나 때문에 모임도 못 가고….”
“아니야. 오빠 마음 편한 게 중요하지. 사랑하는 사람 마음 불편하게 하면서 모임 같은 데 나가면 뭐 해. 그나저나 심장은 괜찮아?”
“응, 이제 괜찮아.”
스트레스 때문에 심장 박동이 이상해지는 건 거짓이 아니었다. 그토록 예민한 신체 반응을 보이는 시기가 내 인생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했다.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내 죄는 그것을 무기 삼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유린했다는 데 있었다. 나는 전형적인 자아도취였다. 애정 타짜였다. 물론 나는 그 시절 내가 자아도취인 줄 몰랐으며, 그게 애정 결핍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당시 가엾은 연인들은 헌신에 가까운 사랑을 주다가 상처만 입고 떠났다. 혜정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몇 개월 뒤, 그는 결국 내 유난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떠났다. “난 오빠의 감정 쓰레기통이 아니야”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긴 채.
나는 그 시절을 딛고 수준 높은 마음공부를 통해 성숙한 인격체로 거듭나 평온한 생활을 누렸…으면 좋으련만! 혜정이와 헤어진 뒤 내 애정결핍은 점차 심해졌다. 그리고 나는 공황장애와 우울증 진단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