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사자의 이타심은 원시적이면서 이기적이다. 생물학적 지침에 따라 자기 새끼를 돌보는 게 번식의 규칙이라면, 우리는 양육 본능을 타고났다. 인간 아기나 강아지를 안아 올린 순간, 아기의 옹알이를 들은 순간, 온몸에 폭포처럼 쏟아져 흐르는 모든 엔도르핀과 옥시토신이 양육 본능의 보상처럼 주어진다. 운이 좋다면 어떻게든 노력할 가치가 있는 대상을 사랑할 것이다. 하지만 때로는 열망의 특효약인 사랑만으로도 그 대상이 필요로 하는 변화의 광채를 전하기에 충분하다.
사랑하는 것과 사랑받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기찻길로 연결된 이웃 도시라 해도 그곳에 가게 된다는 법은 없다. 만에 하나, 둘 사이에서 유대감이 생겨난다면 당신은 제3의 독립체를 갖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받는 사람이 함께 창조해낸 독립체를. 이는 내력 혹은 경험이 되어 점차 강해지며 자신의 감각을 엉망으로 만들 수 있다.
성인이 되고 삶의 대부분을 다른 사람들과 아주 가까이 지내면서도 나만의 움막에 머물렀다.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이를 갖지 않았으며, 여성과 남성 모두를 비롯해 무수한 층위의 사람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동물이 있었다. 어른이 되고 지난 40여 년을 아우르는 동안, 세 곳의 도시에 거주하며 반려동물 없이 지낸 기간은 고작 1년 남짓밖에 되지 않는다. 20대 후반, 술을 지나치게 많이 마시던 때가 있었다. 불행한 관계를 정리한 뒤 ‘리마’라는 이름의 비범한 페르시아 고양이에게 나를 맡겼다. 그 친구는 텍사스 오스틴의 공원에서 산책할 때 마치 강아지처럼 내 발뒤꿈치를 졸졸 따라다녔고, 자기보다 덩치가 큰 암컷 뿔닭을 죽인 적이 있으며, 내 무릎을 간택하곤 새벽 3시에 새끼 고양이들을 낳았다. 자리를 잡고 새끼를 낳기 전까지는 몇 시간 동안 방 안을 빙빙 돌았고, 진통으로 울부짖을 때마다 나와 두 눈을 맞추었다. 리마가 끙끙 앓을 적에 내 자궁이 함께 반응하며 들썩였는데, 마침내 리마는 완벽한 새끼 고양이 네 마리를 낳고 내 품에서 쓰러지듯 잠들었다.
내가 텍사스를 떠날 때, 리마는 살던 곳에 남는 게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훗날 오랫동안 녀석을 두고 떠나온 데 대한 죄책감과 슬픔을 안고 살았다.
동부 해안에서는 1년간 술과 두려움에 절어 지내다가 드디어 다른 반려동물을 만났다. 과거를 되풀이하길 희망하듯 혹은 리마를 두고 떠난 걸 속죄하듯, 나는 새로 정착한 보스턴의 작고 어두운 다락방에 은빛의 수컷 페르시아 고양이를 데려왔다. 커다란 몸집에 벨벳처럼 그윽한 눈빛을 지닌 그 친구는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두려워했다. 이유를 가늠할 순 없지만 나는 녀석에게 ‘대실 해밋Dashiell Hammett’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아마도 녀석에게 용기를 주고 싶었거나, 내가 빠진 혼란에 위스키를 탄 허세를 더하고 싶었던 거겠지. 밤마다 나는 침대 옆에 앉아 스카치위스키를 마셔대며 스스로를 천천히 죽였고, 대실은 침대 위 베개에 가만히 누워 있었다. 나를 감시하는 의무를 맡아준 대실을 특히나 더 사랑했다. 내 역경의 목격자인 대실 덕에 나는 대실패의 벼랑에서 조금이나마 거리를 둘 수 있었다. 내가 술에 취하든, 숙취에 시달리든, 갈망을 망각한 구렁에 빠지든 간에, 대실은 내가 맡은 일을 하게 해주는 조용하고 차분한 나침반이 되어주었다. 대실의 화장실은 늘 깨끗했고, 내 식료품 창고에 술병이 가득할지라도 녀석의 사료가 떨어지는 날은 없었다.
어떤 때 나는 대실을 그리 많이 사랑하진 않는 것 같았다. 녀석은 소심했고 시큰둥하며 심통스러웠다. 그러나 열다섯 살이 된 대실을 안락사시켜야 했을 때, 나는 주먹으로 가슴을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흐느껴 울었다.
대실이 죽을 때 내겐 클레멘타인이 있었다. 그때만 해도 대담했던 세 살짜리 강아지. 그리고 캐럴라인도 있었다. 단 하나뿐인 최고의 친구, 새로이 시작한 반려견 사랑을 함께하며 소울메이트로서 속 깊은 이야기까지 나눈 친구. 우리는 결승선을 함께 넘을 거라 굳게 믿었다. 미래를 내다보는 이야기를 수년간 나누던 우리는 개들이 먼저 죽는다는 공포감에 질려버렸다. 너무도 암울한 생각에 저항할 방법은 유머뿐이었다. 캐럴라인은 이렇게 말하곤 했다. “생각해봐, 자기가 70대가 되고 내가 60대가 되면, 같이 프레시Fresh 호수 주변을 느릿느릿 산책하는 거야. 루실과 클레멘타인은 둘 다 서른세 살이겠지.”
불과 몇 년 뒤 캐럴라인이 암에 걸려 마흔둘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리라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캐럴라인의 죽음으로 세상이 심하게 흔들린 나머지, 내 삶의 무대와 출연진을 완전히 재정비하고 새로운 각본을 짜야 할 것만 같았다. 그 뒤 6년 동안, 클레멘타인은 옆에서 나를 지켜주고, 내가 앞으로 나아갈 명분이 되어주었다. 녀석은 열세 살이 될 때까지 내 곁에 머물며 내가 무자비한 공격을 받을 때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때도, 삶이 움푹 파이거나 애처로울 때도 늘 함께해주었다. 그러다가 클레멘타인도 나를 떠나야 했고 나도 그 친구를 보내주어야 했다. 세상에는 결코 회복할 수 없는, 회복하고 싶지도 않은 아픔이 있는 것 같다.
누군가 죽고 난 뒤 우리는 상대방과 함께 나누던 것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캐럴라인을 떠나보낸 뒤 그리고 클레멘타인을 보낸 뒤에도 내가 속했던 ‘우리’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늘 함께 나눴던 즐거움. 육체적, 정서적으로 의지할 힘이 되어준 이들. “이 고요한 먼지는 /신사이고 숙녀이며 / 소년 소녀들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