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카와 연락을 주고받은 건 여행에서 돌아온 지 일주일이 지나서였다. 시시껄렁한 내용의 메시지를 보내자 곧바로 답이 왔는데, 다음 주 일이 일찍 끝나는 날이 있는데 만나지 않겠냐고 했다. 나도 일이 일찍 끝날 것 같아서 그러자고 한 뒤, 어디서 만나면 좋겠냐고 묻자 스튜디오와 가깝기도 하고 오랜만에 시부야에 가고 싶다고 해서 도겐자카에 있는 카페에서 오후 5시에 만나기로 했다.
사이카의 제안대로 밤에는 시가 바로 변신하는 카페에 먼저 도착해 소파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곧 커다란 가방과 종이봉투를 든 사이카가 도착해 맞은편에 앉았다. 매니저가 차로 데려다줬다고 했다. 살짝 컬이 들어간 머리를 양 갈래로 나눠 검은 스웨이드 가죽끈으로 높이 올려 묶은 모습을 보고, 연예인 쇼다 사이카의 트레이드마크가 이 헤어스타일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렸다. 트윈테일이라는 말랑말랑한 단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헤어스타일이었는데, 고양이 같은 눈매가 한층 부각되면서 전투적인 분위기마저 풍겼다. 유행할 것 같으면서도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사이카라서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 여성 패션 잡지 화보에서도 이 헤어스타일을 한 사이카를 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양 갈래를 다시 몇 갈래로 나눈 다음 폭이 삼 센티미터쯤 되는 가는 날붙이처럼 만들어 스프레이로 고정해 에지 있는 스타일로 연출했었다. 질감에 변화를 주면 명품브랜드 의상에도, 캐주얼한 복장에도 위화감 없이 어울리는 헤어스타일이었다
“그 헤어스타일, 잡지에서 자주 하던 거지! 본 적 있어, 역시 잘 어울린다.” “아, 촬영 끝나고 바로 와서.”
사이카가 양쪽 머리끈을 잡아당겨 풀자 갈색 머리가 얼굴선을 따라 스르륵 흘러내렸다. 잘 어울렸는데. 은근히 아쉬웠지만 그 머리를 하고 있으면 주변 사람들이 알아채겠지.
“아이는 보브 스타일이네. 턱 라인에 맞춰서 다듬는 거야?” “응. 난 고등학생 때부터 계속 이 스타일이야.”
앞머리가 눈썹 위로 내려오는 이 보브 스타일은 아침에 관리하기 쉬웠다. 자다가 눌린 자국이 있어도 물을 살짝 묻혀서 드라이어로 말리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파마를 할 필요도 없고, 자르러 갈 때 염색까지 같이 하면 따로 손이 가지 않아서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아이한테 잘 어울려. 정면에서 봐도 샤프한 느낌이라 잘 어울리지만 특히 옆에서 봤을 때 머리카락이 뺨을 덮는 순간의 느낌이 최고야. 아이는 목이 길고 턱에서 귀까지의 라인이 특히 고우니까 역시 짧은 머리가 어울려.”
“고마워.”
사이카에게 이런 칭찬을 들을 줄은 몰랐던 까닭에 살짝 말문이 막혔다.
“하루 종일 바빴어?” “아니, 오늘은 외부 촬영이 없어서 아침부터 계속 시원한 스튜디오에 있었어. 아까 밖에 나와서야 오늘 날씨가 더운 줄 알았다니까. 넌 어디서 일해?” “휴대전화 매장. 카운터에서 고객의 신규 가입 절차나 조작 방법을 안내해. 계속 재밌게 일했는데, 요새는 좀…… 아, 또 생각났다.” “왜?”
“요새 좀 귀찮은 고객한테 시달리거든. 우울해지니까 퇴근하고 나서는 생각 안 하려고 해.” “귀찮은 고객이라니, 어떻게?” “금요일 저녁마다 찾아와 날 괴롭히면서 스트레스 푸는 사람이야. 부부가 같이 오는데 왜 이것도 못하냐, 저것도 못하냐, 이러고도 직원이냐, 매번 들들 볶아대서 정말 노이로제 걸릴 것 같아. 아, 결혼이라도 하면 바로 퇴사하는 건데.” “정말 그러고 싶어? 진상 고객이 있다고 결혼을 핑계로 도망치고 싶은 거야? 어떻게든 스스로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 “나도 나름대로 애썼지만 잘 안 됐어. 그쪽은 지치지도 않고 매주 찾아오는걸. 이제 싸울 기력도 없고, 그냥 포기 상태야.” “그런 인간 때문에 자기 자리를 잃다니 말도 안 돼.”
사이카가 망설임 없는 올곧은 눈동자로 단언했다.
“그건 그런데, 그 고객은 정말 진상이라 소름 끼칠 정도야. 그리고 지금 직장을 엄청 좋아하냐면 또 그렇지도 않거든. 새 기종이 나올 때마다 공부하거나 어떻게 하면 더 알기 쉽게 고객들에게 기능을 설명할지 연구하는 일은 즐겁고 보람도 느껴. 근데 솔직히 좋아하는 일은 아니라 별로 애착이 없어. 나도 사이카처럼 내가 아니면 못 하는, 내 능력을 인정받고 더 성장할 수 있는 일이라면 설령 결혼하더라도 계속하겠지만.”
“내가 하는 일도 나 아니면 안 되는 건 아냐. 대신할 사람은 얼마든지 있어. 오히려 너는 안 된다, 재능이 없다 같은 말을 계속 들으면서 몇 년씩 억지로 버티다가 겨우 자리를 잡았으니, 오기로라도 절대 안 비키겠다는 게 지금 내 상황이지. 조만간 그만둔다고 굳이 남의 샌드백이 되어줄 필요 없잖아. 그리고 진심으로 붙잡고 싶은 일을 찾는 건 남자, 여자,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인간으로서 중요한 목표 아냐?” “찾을 수 있으면 행복하겠지. 하지만 사이카처럼 맞는 일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은 정말 한 줌뿐이야. 대부분의 사람은 스스로 잘 맞는지 아닌지도 모를 일을 빨리 끝나라, 지겨워 죽겠다 생각하며 날마다 억지로 하고 있는걸. 나도 그중의 하나고. 그나마 소우가 있어 개중에서는 형편이 나은 경우지만.”
“나도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건 아냐. 스카우트된 게 아니고 오디션에 몇 번이나 떨어지고 나서야 기획사에 들어간 거라 일이 없을 때는 파티에서 접객도 했고, 모던 바에서도 일해봤어. 연예계 관계자들이 자주 찾는 클럽에서 일을 하는 등 정말 몸 파는 거 말고는 닥치는 대로 다 했다고. 아무도 안 볼 인터넷 쇼핑몰 모델이나, 몸매가 적나라하게 다 드러나는 수영복을 입고 화보를 촬영하는 일 같은 걸 원해서 했겠어? 근데 뭐가 지름길인지, 정답인지 하나도 모르니까 열다섯 살 때부터 학교도 안 다니고 일만 했어. 그래서 지금의 내가 있는 거고.”
사이카에게서는 자신이 쌓아온 커리어에 대한 정열과 자신감이 넘쳐흘렀다. 맥주를 마시며 감동했다.
“고생 끝에 지금 자리까지 올라온 거구나, 몰랐어. 하긴 자기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일이나 보람을 찾는 건 남녀나 결혼 여부에 상관없이 중요하지. 나도 예전에는 하고 싶은 일이 있었어. 근데 도중에 안 되겠다고 포기한 뒤로 직업에 대한 꿈은 버렸지.” “뭐가 되고 싶었는데?” “탐험가가 되고 싶었어.”
내 말을 들은 사이카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가 먹고 있던 파에야의 노란 사프란라이스 밥알이 테이블에 튀었다.
“미안.”
(중략)
저녁을 먹은 우리는 시부야의 밤거리를 돌아다녔다. 사이카의 소원대로 도겐자카와 센터 거리를 산책했지만 해가 저물고 나서도 여전히 찌는 듯 더워서 인파에 부대끼다 고작 오 분 만에 땀투성이가 되었다.
빌딩 벽면의 거대한 포스터, 광고가 흘러나오는 대형 모니터, 도로를 달리는 선전용 트럭, 빌딩을 빼곡히 채운 수많은 간판. 구석구석까지 광고로 뒤덮인 시부야는 최첨단을 달리는 거리인데도 왠지 모를 그리움이 느껴지는 번잡한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일본이라기보다는 아직 한창 경제성장세에 있는 아시아의 어느 도시 같은 얼굴로, 사람들을 무섭게 갈아치우면서도 벌써 수십 년 동안 열띤 분위기를 유지하며 에너지를 내뿜고 있었다.
게다가 여름이라 덥기까지 했다. 어느 열대우림에 있는 듯 짙은 구름 아래로 습하고 무더운 공기가 가득 차 있었고, 눈이 따가울 정도의 진한 분홍색과 검은색으로 도배된 유흥업소 입간판은 여느 때보다 자극적으로 보였다.
모자를 눈가까지 푹 눌러쓴 사이카를 알아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설사 알아봤더라도 사생활을 존중해주는 건지 말을 걸거나 악수를 청하는 이는 없었고 우리는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했다.
“이제 못 걷겠어, 너무 더워. 어디서 좀 쉬자.”
더위에 약한지, 금방 축 늘어져 배기가스를 맞은 무지개 빛깔 솜사탕처럼 꼬질꼬질해진 사이카는 오 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러자. 예약 안 해도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을 찾아봐야겠네.”
나 역시 땀에 젖은 셔츠가 피부에 달라붙어 불쾌하던 차였다. 습기는 충분한데도 목은 건조했다. 가게를 몇 군데 돌았지만 저녁 시간이라 어디든 만석이었고, 결국엔 어느 빌딩에 있는 노래방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갔다.
노래방을 찾기에는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인지 다행히 빈방이 하나 있어 칠층 방에 들어갔다. 시부야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실내 구석구석 스며들었다. 우리 방은 두 사람만 들어가도 꽉 차는 비좁은 공간이었다. 유독 커다랗게 보이는 에어컨을 켜자 바람이 직접 얼굴을 때렸고, 열리지 않는 창문 너머로는 모텔의 네온사인이 즐비했다. 흡연실 특유의 찌든 담배 냄새가 역했지만 그래도 바깥에 비하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주문한 파인애플 추하이를 한 모금 마셨다. 이걸 파인애플 추하이라 불러도 될까 싶을 정도로, 알코올을 함유한 소량의 무언가에 탄산수와 빙수 시럽을 넣고 섞은 맛이었다. 사이카는 스푸모니라는 선연한 레드 칵테일을 순식간에 비우더니 뜻밖에도 같은 술을 또 주문했다.
“그건 맛있어? 내가 시킨 건 아무 맛도 안 나.” “목이 말라서 뭐든 맛있네.” “그럼 나도 같은 음료 주문해야겠다. 무슨 노래 부를래?”
애초에 노래방에 올 생각은 없었지만 우리는 마이크 쟁탈전을 벌이듯 다양한 노래를 불렀다. 싸구려 술답게 빠르게 취기가 돌아서 나는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 겸, 기다렸다는 듯 신나게 소리 지르는 노래를 연속해서 선곡했다. 사이카도 유행하는 여성 가수의 노래나 내가 모르는 외국 록을 탄력 있는 목소리로 불렀다. 그렇게 세 시간이 흘러 목도 쉬고 레퍼토리도 떨어졌을 즈음에는 11시가 지나 있었다.
“아이 차례야.”
사이카가 노래방 리모컨을 들이밀었지만 이제 부를 노래가 생각나지 않았다.
“난 됐어, 너 불러.” “뭐야, 계속 나만 불렀잖아.” “그럼 이제 갈까?” “벌써 간다고? 그럼 내가 부를게. 대신 나 따라서 움직여봐.” “응?”
옆자리에 있던 사이카가 정면에 섰다.
“오른팔 내밀어, 왼팔도 내밀고.”
사이카와 같은 자세를 취했더니 서로 마주 보고 앞으로나란히를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두 손을 올려.”
이제는 만세 포즈였다.
“손깍지 껴.”
머리 위에서 왼손과 오른손을 깍지 끼자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이카가 재빨리 내 품으로 달려들어 나를 끌어안았다.
“저기, 연예계에서는 이러고 놀아?”
좋아 죽겠다는 표정으로 내 어깨에 얼굴을 비비는 사이카의 모습에 놀라며 물었다.
“응? 그건 왜?” “일반인들은 이러고 안 놀거든. 일전에 그 주사위 게임도 그렇고…….” “들켰네.”
팔을 내렸지만 사이카가 여전히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기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다쿠마 앞에서는 이러지 마. 술자리에서 하는 게임 같은 거에 빠삭한 거 보면 밖에서 많이 놀고 다닌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다쿠마한테는 안 이러거든.” “그럼 됐고.”
이제 몇 잔째인지도, 무슨 술인지도 모를 딸기색의 액체를 마시다 막차 시간 전에 일어나야겠다 생각하며 흐린 눈으로 시계를 보았다. 그러다 귓가에 흘러들어온 드라마틱한 전주에 고개를 들었다. 사이카는 ‘러브스토리는 갑자기’라는 우리가 태어났을 즈음 유행했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무엇부터 말해야 할지 모른 채 시간은 흐르고
떠올랐다 사라지는 흔해 빠진 말들뿐
“나 이 노래 좋아해! 어릴 때 텔레비전에서 재방송했던 드라마 주제가였지?”
사이카는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계속 노래를 불렀다. 이 노래는 아까까지 사이카가 불렀던 여성 가수의 최신 히트곡이나 서양 록 음악과 달리 남성 가수의 노래라 음역이 낮았다. 그래서 군데군데 음이 내려가지 않기도 해 결코 잘 부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진지한 노랫소리가 가슴에 울려 퍼졌다.
당신이 너무 멋져서 그냥 솔직하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어서 아마 곧 비가 그치고 우리 둘은 황혼 속에
담담한 어조이면서도 숨길 수 없는 정열을 담은 멜로디를 듣고 있으려니 왠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 마이크를 들고 후렴구를 같이 불렀다.
그날 그때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모르는 사이였겠죠
멜로디 라인도, 가사도, 어렴풋이만 기억나는데도 생각보다 잘 따라 부를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아졌다. 다음 부분도 같이 불렀다.
“잠깐! 이제 내가 부를 거니까 쉿! 음치면서 목소리는 왜 이렇게 커!”
나는 목소리를 더 높였고 사이카도 지지 않겠다는 듯 볼륨을 높여 우렁차게 열창했다.
다른 누군가의 달콤한 유혹의 말에 흔들리지 말아요 당신을 품은 그 바람이 될래요 그날 그때 그곳에서 당신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언제까지나 모르는 사이였겠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