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튿날에는 소우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생과 사가 교차하는 산길을 지나 바다에 도착한 뒤, 수많은 해수욕객들에 섞여 물놀이를 하고 놀다 3시 반에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주차장에 어제까지 없던 차가 몇 대쯤 주차되어 있었고, 로비에는 몇몇 그룹이 줄을 서 있었다. 주말여행을 온 손님들이 체크인하려고 기다리는 거겠지. 북적거리는 호텔 분위기에 다소 마음이 놓였다. 명색이 리조트 호텔인데 그래도 어느 정도 사람이 있어야 기분이 들뜨지 않겠는가. 지나가다 사람을 마주친 적이 별로 없어 숙박객이 얼마 없는가 했는데, 막상 조식 뷔페에 갔더니 생각보다 사람이 꽤 많아 놀랐다. 호텔이 워낙 넓어서 손님이 없다고 멋대로 착각했던 모양이다.
로비 소파에 앉아 차멀미로 금방이라도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달래고 있을 때였다. 소우가 갑작스레 카운터 쪽으로 달려가 체크인 차례를 기다리던 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일행으로 보이는 여자와 같이 있던 그 남자는 친근하게 말을 걸어온 소우를 금방 알아본 듯 환한 미소를 지었다. 스타일 좋은 세련된 커플이었는데, 가족 단위 손님이 많은 이 호텔에서 아까부터 은근히 눈이 가던 사람들이었다.
거리가 멀어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지만 소우와 남자는 즐겁게 웃으며 서로의 어깨를 치고 있었다. 같이 있는 여자는 아는 사이가 아닌지 꿈쩍도 않고 선글라스 너머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소우가 이쪽으로 오라며 손짓했다.
“아이, 우연히 반가운 옛 친구를 만났어. 나카니시 다쿠마, 초등학생 때 방학마다 이 호텔에서 같이 놀던 녀석이야.”
“소꿉친구?”
얼굴 윤곽에 잘 어울리는 검은 프레임의 안경을 낀 다쿠마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아버지끼리 친해서 이 호텔이 직원 휴양소이던 중학생 때까지 일 년에 한 번은 꼭 보던 사이예요.” “다쿠마, 정말 오랜만이다. 그때보다 키가 훨씬 컸지만 분위기는 하나도 안 바뀌었네. 한눈에 넌 줄 알았어.” “나도 너가 다가왔을 때 바로 알아봤어. 큰 걸음으로 성큼성큼 걷는 게 어릴 적 그대로라! 산길을 운전해서 오는데 호텔 생각이 나면서 네 생각도 나더라고. 소우는 지금 어떻게 지낼까 했는데 설마 실제로 만날 줄이야.”
“이런 우연이 다 있네. 역시 다쿠마도 이맘때면 저절로 여기 생각이 나는구나.” “맞아, 각인 효과 같은 건가봐. 여름, 겨울마다 유자와 휴양소에 가야 되는데, 하는 생각이 든다니까.” “이젠 스카이호텔 유자와지, 세월 참 빨라.”
짙은 쌍꺼풀과 도톰한 애교살이 인상적인 다쿠마는 피부가 나보다 희었고 어깨도 떡 벌어지고 키도 훤칠한 데다 손도 컸다. 파마를 했는지 컬이 살짝 들어간 헤어스타일도 잘 어울렸다. 한눈에 봐도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소우의 그늘에 살짝 숨어 조신한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소우 여자친구 난리 아이예요. 저희는 사흘 더 있을 건데 괜찮으시면 같이 놀아요.” “감사합니다. 저희도 사흘 묵을 예정인데 잘 부탁드립니다.”
다쿠마는 인상 좋은 산뜻한 사람이었지만 같이 온 여자는 살짝 고개를 까닥했을 뿐 여전히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선이 고운 분홍색 입술에는 으레 짓는 억지웃음조차 보이지 않았다. 못 본 척 웃는 낯으로 시선을 돌려 다시 다쿠마를 보았다. 그의 표정도 약간 굳어 있었다. 긴장 섞인 분위기를 혼자만 알아채지 못한 소우가 “다쿠마 여자친구야? 잘 부탁해요! 마루야마 소우입니다. 이따가 우리 방에서 같이 마실래요? 술을 차에 가득 실어서 산더미만큼 가져왔거든요!” 하고 넉살 좋게 인사를 건네도 여자는 고개를 살짝 갸웃할 뿐 이름도 말하지 않았다. 소우가 딱히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다시 다쿠마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하자 여자가 나를 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구석구석 훑어보는 게 미세한 턱의 움직임을 통해 선글라스 너머로도 전해졌다. 빤한 시선이 쏟아지는데도 선글라스가 가리고 있어 내 쪽에선 상대의 눈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파악할 수 없었다. 일방적인 시선을 받고 있으려니 내심 불편했다.
“나중에 방에서 천천히 이야기 나누자. 소우, 휴대전화 번호 안 바뀌었지? 이따가 연락할게.”
일행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한 다쿠마는 서둘러 그렇게 말하더니 여자의 어깨를 살며시 안고 다시 체크인 줄로 돌아갔다. 우리도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떴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살짝 돌아보자 그는 ‘피곤한데 서서 이야기하게 해서 미안해’ 하고 사과라도 하듯 옆에 있는 여자에게 계속 말을 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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