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내부로 들어가 제일 먼저 21층 마카오 스위트로 올라갔다. 만다린 오리엔탈이 자랑하는 최고급 스위트룸이자 장국영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투숙했던 곳이다. 그러니까 3월 31일 코즈웨이베이의 ‘퓨전’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마치고 돌아와 저 방문을 열고 들어간 장국영은 다시는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장국영이 묵었던 마카오 스위트는 이제 없다. 만다린 오리엔탈이 2006년 대대적인 리모델링 작업을 거치면서 실제 장국영이 묵었던 24층 객실 자체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장국영 사망 이후, 호텔 측으로서도 부득이한 리노베이션이었을 것이다. 21층에서 내려와 장국영이 종종 한가로이 애프터눈 티를 즐겼던 2층 클리퍼 라운지Clipper Lounge로 향했다. 역시 사람들로 가득해 앉을 자리는 없고 직원은 같은 층 맞은편에 있는 카페 코셋Cafe Coset으로 안내한다. 이곳에서 같은 경험을 한 관광객이 무척 많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장소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가 즐겨 앉았다는 2층 창가 자리를 가만히 쳐다보면서 어슬렁거렸다.
해외여행이란 게 그렇다. ‘언제 또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안타까운 심정이 되면 결코 한국에서는 발휘한 적 없던 인내심으로 충만해진다. 그래서 무작정 절대 살 일 없는 명품숍들이 즐비한 그 복도를 몇 번이고 두리번두리번하며 돌아다녔다. 한 양복점의 나이 든 주인장의 인자한 눈빛이 ‘뭐 하는 녀석이길래?’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변해갈 즈음 한 테이블이 비는 걸 목격하고는 잽싸게 자리에 앉았다. 시각은 오후 3시 30분, 애프터눈 티 세트를 시키기엔 딱 좋은 때다. 애프터눈 티 세트는 홍차와 함께 우아한 고급 3단 접시에 아래부터 차례대로 스콘, 샌드위치, 케이크가 딸려 나오는 오랜 영국 식민시대를 통해 자리 잡은 귀족문화 중 하나다. 얼핏 간식처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앞의 점심이나 뒤의 저녁을 위협하는 수준이니 적당히 한 끼 정도는 걸러야 충분히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다.
사실 애프터눈 티의 명가는 따로 있다. <색, 계>(2007) 촬영지인 리펄스베이의 카페 베란다Verandah와 침사추이 페닌슐라 호텔의 더 로비The Lobby가 무척 고풍스럽고 격조 높은 곳이라면, 완차이 그랜드 하얏트 호텔의 티핀Tiffin은 뷔페처럼 다양한 메뉴를 원 없이 맛볼 수 있다. 하지만 다 제쳐두고 이곳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오직 장국영 때문이다.
그런데 바로 그때, 일찌감치 텁텁한 스콘 하나에 괴로워하고 있을 즈음, 내 눈을 의심해야 하는 일이 일어났다. 저 멀리 관지림이 걸어오더니, 건너편 자리에 일행과 함께 앉는 것이 아닌가. 말 그대로 바로 1미터 거리다. 관지림을 클리퍼 라운지에서 만나다니, 생에 이처럼 판타스틱하게 스타와 마주치는 우연이 있을까. 마치 3D 입체영상 속의 배우가 걸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지존무상>, <정고전가>, <동방불패> 그리고 이연걸의 <황비홍> 시리즈에 쭉 출연했던 관지림은 장국영을 무척 좋아했고 또한 가까웠던 동료 배우다.
한 TV 토크쇼 인터뷰에서 좋아하는 홍콩 남자배우들의 순위를 매겨달라는 질문에 주윤발을 ‘최고의 남편감’이라 했고, 유덕화를 ‘오빠 같은 친구’라고 말하더니, ‘가장 좋은 인생 상담자’로 장국영을 꼽았다. “내 얘기를 가장 잘 들어주는 남자”가 바로 장국영이라면서 말이다. 둘은 이곳 클리퍼 라운지에서 종종 만나 서로의 고민을 얘기하고 들어주고 그러지 않았을까.
<영웅본색2>(1987)에 악덕 보스로 출연했던 홍콩영화계의 유명 배우인 관산의 딸이기도 한 관지림은, 1981년 데뷔한 TV 드라마 <달콤한 24가지 맛>에서 장국영을 처음 만났다. 장국영은 새하얀 교복이 잘 어울렸던 영화 <실업생>(1981) 등 이미 몇 년 전 연예계에 데뷔한 상태였고, 막 데뷔한 그녀와 달리 그 드라마의 주인공이었다. 처음 만난 그때부터 서로 얘기가 잘 통했다고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다작 관행의 홍콩영화계 안에서 둘은 그렇게 많은 영화에 출연하면서도 함께했던 기억이 별로 없다.
하지만 단 한 편의 기억이 너무 강렬하게 남아 있다. 바로 <패왕별희>(1993)보다 장국영의 여장이 아름답고 섹시한 영화였던, 그래서 영화 속 오맹달이 착각한 나머지 그 모습에 흠뻑 빠져 장국영을 덮치려 했던 <가유희사2>(1993)다. 거리의 마술사인 장국영에게 반한 오맹달의 딸 관지림은 장국영의 아이를 가졌다는 거짓말까지 하고, 그 관계가 뜻한 대로 이뤄지지 않자 장국영은 관지림을 만나기 위해 바로 그 유명한 여장을 하고 흔들리는 가마 안에서 멀미를 하는 고통까지 감수하면서 잠입하려 했다. 그랬던 관지림이 지금 내 눈앞에 있었다.
바로 옆자리였기에 실례를 무릅쓰고 말을 걸어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다. 사진을 함께 찍고 싶다는 생각에 카메라를 든 손은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그러다 용기를 냈다. 물론 관지림 일행의 얘기가 대략 끝나기를 기다려야겠다는 어림짐작까지 하면서 말이다. 대충 타이밍을 맞춰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한국에서 온 당신의 열렬한 팬이며 사진을 찍고 싶다고 청했다. 감동적이게도 관지림은 정말 활짝 웃어주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