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룡반도에 존재했던 고층, 고밀도 슬럼 지역이었던 구룡성채는 1992년 강제 재개발에 들어가 이제는 구룡채성공원Kowloon Walled City Park, 九龍寨城公園으로 바뀌었다. 과거 구룡성채는 ‘동양의 카스바’라 불리며 <중경삼림>에 등장했던 중경맨션과 함께, 외지사람들이 발을 들여놓으면 두 번 다시 나올 수 없는 ‘마굴’ 로 불렸다. 청일전쟁을 계기로 영국이 홍콩을 99년간 조차하게 됐는데, 이 성채만큼은 계속 중국의 통치하에 남겨두었다. 하지만 중국군은 성채에서 철수했고 이를 돌보지 않았다. 그래서 구룡성채는 영국과 중국 두 나라의 통치를 전혀 받지 않는 무법지대가 된 것이다. 중국에서 들어온 난민들, 마약 거래까지 일삼는 삼합회의 도박장, 매춘업소 등이 들어선 악명 높은 슬럼 지역이었다.
중국 본토에서 홍콩으로 밀입국한 친구들이 범죄의 세계로 내몰리는 맥당웅의 <성항기병>(1984)도 이곳에서 촬영됐고, 오시이 마모루의 <공각기동대>(1995)에서 아무런 생기도 느껴지지 않는 디스토피아적인 미래도시의 이미지도 이곳에서 유래했다. 출구와 입구의 구분이 무의미해 보일 정도로 미로와도 같은, 막다른 곳에 다다른 인물들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의 현실판처럼 보이는 곳이 바로 구룡성채였다. 또한 SF작가 윌리엄 깁슨은 《버추얼 라이트》, 《코드명 J》를 비롯 《아이도루》의 암흑도시 헤크넘의 이미지를 구룡성채에서 영감을 얻었다.
정말 한번 보면 잊히지 않는 비주얼,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사라져버린 기억 속의 장소다. 그렇게 <성항기병>과 <아비정전>의 촬영지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다가 한 사진집을 보면서 완전히 매료됐다. 사진작가 그렉 지라르가 1992년 7월 강제 철거되기 직전 구룡성채에 들어가 촬영한 사진집 《City of Darkness》는 쓰레기 더미 속에 묻혀 살아가는 보통 사람들의 얼굴과 일상을 보여준다. 쓰레기 더미 사이에서 뛰노는 해맑은 아이들과 심지어 해먹에 누워 일광욕을 즐기는 사람들, 그리고 소박한 식당부터 치과나 약국 같은 장소들에 이르기까지 한 장 한 장 넘기다 보면 아름답다 못해 숭고할 지경이다. 인터넷에서 구룡성채로 검색하면 뜨는 거의 모든 이미지가 바로 이 사진집에 있는 것들이다.
<쿵푸 허슬>(2004)에서 ‘돼지촌’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낡았지만 인간미 가득한 서민들의 아파트가 바로 그런 느낌이다. 주성치가 자신이 나고 자란 홍콩에 대한 애정을 구룡성채의 축소판으로서 돼지촌을 구성한 것일지도 모른다. 최근 홍콩영화 중에서는 견자단과 유덕화가 주연을 맡고 왕정이 연출한 <추룡>(2017)에 구룡성채가 주 무대로 등장한다. 1963년, 그러니까 <아비정전>의 시기로부터 몇 년 뒤 조폭 견자단과 경찰 유덕화가 의형제를 맺고 홍콩의 매춘, 도박, 마약 3대 산업을 독점해 나가는 ‘홍콩판 <범죄와의 전쟁>’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오직 CG와 세트로만 만들어낸 구룡성채 풍경을 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다.
이곳이 성채라 불렸던 이유는 오래전 송나라 때부터 외적을 방어하던 성벽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1987년 영국 정부와 주민 간의 협의로 성벽을 철거하다가 우연히 청나라 때의 주거지와 고적이 발견되면서 지금의 공원에 이르렀다. 현재 구룡채성공원은 옛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이 청나라 말기의 건축 양식과 누각, 연못 등으로만 구성돼 있다. 공원 안에 옛 구룡성채 관련 자료들을 전시해놓고 있어 눈길을 끈다. 또 거대한 모형도 갖춰져 있고 철거와 개발 과정을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과거에는 그저 군락 정도였는데 1970년대 이후 급격하게 직육면체 모양으로 밀집돼 간 모습을 보면 정말 아연실색할 지경이다. 인간의 무시무시한 생존력이라고나 할까. 구룡성채는 우리 시대의 바벨탑이나 다름없다.
구룡채성공원에 들른 날이면, 주윤발의 단골집으로도 유명한 팀초이키Tim Choi Kee, 添財記 식당을 꼭 찾는다. 1948년 개업하여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은 감칠맛 가득한 창펀肠粉으로 유명하다. 창펀은 돼지고기 등 갖은 재료를 쌀가루 등으로 만든 얇은 피로 돌돌 만 형태로 소스를 뿌려 먹는 홍콩의 대표적인 서민음식이다. <영웅본색> 주윤발의 첫 등장 장면에서, 경찰이 노점 단속으로 뜨기 직전에 주윤발이 사 먹던 길거리 음식이 바로 창펀이다. 땅콩 등 견과류가 잔뜩 들어간 죽도 이 집의 대표 메뉴인데, 바로 그렇게 아침을 시작하는 것이 홍콩 사람들의 소박하고 보편적인 일과다. 주윤발의 단골집으로 유명하다 보니 유재석의 <런닝맨> 등 한국 예능 프로그램에서 이곳을 여러 번 찾았고, 이후 많은 한국 관광객이 들르는 곳이 됐다. 그런 이유로 갑자기 외국인(한국인) 관광객이 늘어서일까, 한국에서 왔다고 하면 주인아저씨가 활짝 웃으며 반겨준다.
교통이 다소 불편해서 자주 찾긴 힘들었으나, 호텔 조식을 포기하고 이곳을 처음 찾았던 날 “혹시 오늘도 주윤발 왔어요?” 하고 아무런 기대도 없이 물었다가 “1시간 전에 음식 포장해서 나갔죠”라는 답을 들었다. 진짜 그의 단골집임은 그렇게 증명되었다. ‘저우룬파’라는 북경어 이름으로 묻지 않고 ‘초우윤팟’이라는 광둥어 이름으로 물어서 주인아저씨가 더 신나게 이것저것 얘기해줬다는 건 틈새 정보다. 물론 내 기분 탓일 수도 있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