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 번째 영.레터 〈하버드 스퀘어〉, 그리고 영레터의 작은 변신을 소개합니다.
대단히 추운 날들이 계속 되고 있습니다. 구독자 님은 잘 지내셨나요? 오늘은 영.레터의 여섯 번째 책인 〈하버드 스퀘어〉도 소개하고, 영.레터의 작은 변신도 보여드리려 메일을 드립니다. 그럼 먼저, 담당자의 기대작인 〈하버드 스퀘어〉 이야기부터 해보겠습니다. (사실 모든 책이 기대작이지만요 😁) 2017년 크게 사랑받은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기억하시나요? 〈하버드 스퀘어〉는 바로 그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의 동명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안드레 애치먼의 소설입니다. 혹시 사진이 눈에 익으신가요? 미국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하버드 대학교의 항공 사진입니다. 사진의 왼쪽 중간 쯤에 있는 분홍색 영역을 '하버드 광장 (Harvard Square)'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하버드 광장' 뿐 아니라, 소설에 등장하는 많은 지명과 상호명이 실제로 존재하는 곳입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집트 출신으로 하버드 대학교에서 문학을 전공했는데요, 작가인 안드레 애치먼 역시 그렇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하버드 스퀘어〉는 자전적 소설로 평가받는데, 이야기를 회고록의 형태가 아닌 소설로 쓴 이유에 대해 애치먼은 이렇게 밝혔습니다. "나는 주인공에게 '안드레'라는 이름을 붙이기가 망설여진다. 어쩌면 나는 문학으로서의 리얼리즘을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내 이야기 안에서 어떤 것들은 조금씩 바뀌었고, 나는 바뀐 이야기에 자유를 선사하고 싶었다." '지나간 시절의 그리움을 간직한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러브레터, 고독하고 쓰라렸던 젊은 날의 공백을 찬란하게 채우는 소설'인 〈하버드 스퀘어〉 는 주된 이야기의 시점에서 한참이 지난 어느 때 아들과 함께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를 방문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됩니다. 오늘은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인 프롤로그를 먼저 살짝 보여드립니다. 하버드 시절의 기억은 마음 한구석에 꼭꼭 잘 숨긴 상태였다. 잊었다기보다는 언젠가 그 기억을 되살릴 만한 힘과 여유가 있을 때 다시 꺼내 보려고 꽁꽁 얼려놓았다고 하는 게 맞겠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다. 지금 내가 꺼내고 싶은 것은 그 이후의 사랑, 그 오랜 세월 내가 품어온 사랑, 너무나 그립지만 돌아가 다시 살고 싶다는 생각은 단 일 분도 들지 않는 그 시절로 기어코 나를 잡아끄는, 마법과도 같은 그 이후의 사랑이었다. 아마도 그 사랑이 나로 하여금 아들과 함께 캠퍼스 투어의 대장정을 시작하게 만든 것 같다. 나는 내 방패이자 보호막이자 대리인인 아들을 데리고 케임브리지에 다시 와보고 싶었다. 유치원 시절부터 아들에게 심어준 이미지들을 파괴하지 않고, 열일곱 살이 된 아들에게 어떻게 이 감정을 설명할 수 있을까? 조용한 일요일 저녁의 케임브리지. 친구들과 함께했던 비 오는 오후의 케임브리지.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하루가 짧아진 것 같고 축제 분위기였던 눈보라 치던 날들. 그때 나는 《이선 프롬》에 나오는 장소로 나를 데려가기 위한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고 상상하곤 했었다. 금요일 밤 활기가 넘치던 하버드 광장. 1월 중순 기말시험 준비 기간의 하버드. 커피, 또 커피. 사방에서 들리는 타닥타닥 타이핑하는 소리. 시험 직전의 로웰 기숙사, 봄기운이 완연한 잔디밭에 학생들이 몇 시간이고 눕거나 앉아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눌 때, 초여름 의 소리에 묻혀 더 작게 들려오던 그 목소리들. “난 여길 사랑했다.” 내가 말했다. “여전히 사랑하고.” 어느새 우린 쿱에 들어가 있었다. “회원 번호 아직도 유효하냐고 물어보지 마세요, 제발.” 아들이 간청했다. 내 마음이 어디로 흘러가는지 눈치챈 아들은 관심도 없는 점원에게 아버지가 옛날 이야기를 자꾸 해서 자신을 당혹스럽게 만들까 봐 걱정인 모양이었다. 나는 아무 말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티셔츠를 한 장씩 사고 나서는 “346 408 8”이 나도 모르게 나와버렸다. 나는 예전에 담배를 살 때 항상 회원 번호를 불러주었기 때문에 아직도 기억한다고 점원에게 말했다. 그 당시엔 한 번에 한 갑씩, 하루 두 번 담배를 사곤 했다. 그러나 점원은 컴퓨터에 번호를 입력하더니 내가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내 옛날 전화번호도 내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았다. 살면서 무슨 특별한 일을 하지 않는 한, 케임브리지에 와서 몇 년을 살았음에도 이곳에, 이 행성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못하는 걸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과연 여기 시스템에 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한때 이곳에 속해 있었지만, 이곳이 정말 내 집이었을까? 아니면 이곳에 속해 있었다고 자신 있게 주장할 수 없는 데도, 이곳이 내 집이었다고 할 수 있을까?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는 말은 이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 있었다. 아들은 점원과 대화를 나누지 말라고 무언의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나는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다거나 들어 있었던 적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는 점원에게 다시 한번 확인해달라면서 내 회원 번호를 다시 불렀다. “죄송합니다, 손님.” 젊은 남자 점원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손님 성함과 회원 번호는 있는데, 휴면 상태라서 복구부터 하셔야겠는데요.” 그러니까 나는 시스템에 들어 있었지만, 비활성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더지나 스파이처럼 항상 존재하되, 구석에만 머물면서. 그 말이 모든 걸 요약해서 보여주었다. 이건 아들에게 보이고 싶었던 모습이 아니었다. 브래틀 거리에 다가가니 많이 변한 것 같으면서도 변한 게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브래틀 극장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지만 지하에 새로운 출입구가 생겼다. 카사블랑카도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부를 다 뜯어고치고 축소해놓았다. 그리고 카페 알제는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지만 초록색 로고는 그대로였다. 나는 그 오래된 카페 앞에 잠시 멈췄다. 몇 년 동안 뻔질나게 드나들며 책을 읽던 곳, 오래전 어느 여름에 내 인생을 완전히 바꿀 뻔한 사람을 우연히 만난 곳이었다. 그 사람 때문에 나는 내 아들의 아버지가 아닌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도 있었다. (…) 그러나 나는 대서양 이쪽 편의 유일한 ‘내 집’이었던 카페 알제에 밤낮으로 들락거리던 그 시절을 잊을 수가 없었다. 터키식 커피의 향, 카페에 흐르던 샹송,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 눅눅한 느낌이 나던 작은 정사각형 원목 테이블과 그 옆 벽에 붙어 있던 텅 빈 해변 풍경을 담은 포스터. 티파자라는 마을 앞에 펼쳐진 청록색의 맑고 깨끗한 바다. 이 작은 지하 카페에 있던 모든 것이 내가 떠나왔고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중동의 어느 곳을 연상시켰고, 나는 내가 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적어도 아직은 아니었다. 하버드나 미국, 혹은 다른 누군가를 위해, 심지어 언젠가 낳을 아이를 위해서도, 내가 떠나온 곳을 버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케임브리지에 있는 다른 사람들과 같지 않았고, 그들 중 한 명이 아니었으며, 시스템에 들어 있지 않았고, 들어 있었던 적도 없었다. 이곳은 내 집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집이 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이 사람들은 내 동포가 아니었고, 앞으로도 내 동포가 되진 않을 것이었다. 여기는 내 삶의 터전이 아니었고, 내 고향이 아니었으며, 심지어 나 자신이 아니었고, 내가 될 수도 없었다. 1977년 여름의 케임브리지가 그랬다. 한 가지 더! '영.레터'의 얼굴이 조금 바뀐 것을 알아채셨나요? 구독자 님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만나는 만큼, 조금 더 동글동글한 인상을 드리고자 살짝 변신을 해보았습니다. (담당자의 책 자랑 - 지금 서점에서 만나보세요!) 이전 책을 신청하실 때엔 없었던 질문이기 때문에 오늘의 메일은 '영.레터'를 구독하시는 모든 분께 보내드리지만, 아마 구독자 님의 생각은 조금 다르실 수도 있겠지요. 기존의 '영.레터'와 같이 에세이만 받아보고자 하시는 분들은 아래 '수신 상태 변경하기'에서 신청해주시면 처리해드리겠습니다. 따로 신청하지 않으시는 경우 지금과 같이 모든 책을 받아보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정말 좋은 책을 보내드릴 것을 약속드립니다. 우리, 변함 없이 함께 가요 🥰) '영.레터'는 독자 여러분께 항상 열려있습니다. 궁금하신 점이나 보고싶으신 글이 있으시면 언제든 메일 주세요. 주변에 많은 홍보도 부탁드립니다. 그럼 저는 돌아오는 일요일, 〈하버드 스퀘어〉 의 본격적인 첫 이야기와 함께 돌아오겠습니다. 즐거운 금요일 저녁 보내세요! - 담당자 Ja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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